항목 ID | GC05800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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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최범호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전라북도 진안군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무주군과 전라북도 장수군 및 충청남도 금산군을 아우르는 진안고원은 높이 300m 내외의 전형적인 고원 지대로 ‘호남의 지붕’이라고 불리면서 선사 시대 이래로 줄곧 교통의 중심지였다. 진안고원 일대에서는 금강을 중심으로 만경강·동진강·섬진강·남강·황강 유역을 하나로 묶는 내륙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람의 왕래나 물자의 교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고대에는 진안고원의 장악 여부에 따라 토착 세력 집단의 발전 과정이 큰 차이를 보였다.
[진안 지역 고대 국가의 형성 및 발전]
삼한 시대에 진안 지역은 마한의 영역으로 그 안에서는 초기 국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삼국 시대에 진안고원에서는 삼국 및 가야의 문화가 공존했다. 백제는 금강과 섬진강 유역을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를 일찍 장악하여 이 지역을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시켰고 교통 거점에 토성과 산성을 많이 축조했다. 백제의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틈타 가야 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한동안 백제의 간선 교통로를 차단했고, 6세기 전반에는 신라가 무주 지역과 금산 지역 등 진안고원의 동북부를 자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지금의 진안군은 옛 진안현(鎭安縣)과 용담현(龍潭縣)이 합쳐진 것이다. 옛 진안현은 지금의 진안군 중부 이남이고 옛 용담현은 진안군 중부 이북에 위치했다. 삼국 시대에 진안현은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이었는데 난지가(難知可)·난등량(難等良)·월량(月良) 등으로 불렸고, 『삼국사절요』에서는 난지가군(難知可郡)으로 기록되었다. 고대에 진(珍)은 ‘돌’로 읽혔으므로 ‘난진아·난지가’는 ‘난돌아·난드르’로 읽히고, ‘월량’은 ‘달아·다라’로서 ‘돌아·드르’를 다르게 쓴 것이다. 결국 진아와 월량은 같은 말이며, 진안(鎭安)은 이를 미화시킨 표현이다. 용담현은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주천면·동향면·안천면·정천면 일대에 있던 고을로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진안 지역을 서로 점령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와 관련하여 지역에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민들이 전란으로 살 수 없어 한 신동(神童)으로 하여금 백일기도를 드리게 하자,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세운 탑이 상전면 주평리의 회사동 삼층 석탑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였던 이 지역이 빈번한 전란에 시달렸던 사실을 말해 준다.
신라 통일 이후에 757년(경덕왕 16)에 난진아현은 진안현으로 개칭되어 벽계군(壁溪郡)의 영현이 되었고, 물거현은 청거현(淸渠縣)으로 개칭되어 진례군(進禮郡)의 영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