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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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英男 |
영어음역 | I Yeongnam |
이칭/별칭 | 사수(士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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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563년 |
몰년 | 1598년 |
본관 | 양성(陽城) |
대표관직 | 가리포첨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사수(士秀). 할아버지는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낸 이계보(李季寶)이며, 아버지는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역임한 이사종(李嗣宗)이다.
[활동사항]
이영남(李英男)[1563~1598]은 1563년(명종 18) 지금의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에서 태어났다. 22세인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 무과에서 병과(丙科) 제163위(位)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수영 휘하의 율포권관(栗浦權管)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에 연합 지원 함대의 구성을 요청하는 청병사절(請兵使節)로 선발되어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일을 성사시켰다. 당시 그가 청병사절로 선발된 이유는 일찍이 이순신 장군과 구연(舊緣)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합 함대가 구성된 이후에는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자리를 옮겨 1592년 5월부터 1595년 4월까지 3년간 근무하였다. 뒤이어 북방으로 전직되어 1595년(선조 28) 7월부터 12월까지 약 6개월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을 역임하였다. 이후 다시 남방의 수군(水軍)으로 돌아와 율포만호(栗浦萬戶)·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를 역임하면서 해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가리포첨사로 있던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일본군과의 최후의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여 역전(力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향년 36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 산88-4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5년(선조 38) 절충장군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960년 8월 진천군 유도회(儒道會)에서 충절을 기려 진천군 읍내리 삼수초등학교 정문 앞에 현충비를 세웠다. 또한 순국 당시 통제영이 있던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의 충무사(忠武祠)에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하여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