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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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영숙 |
[개설]
진천 용몽리 농요는 진천군 덕산읍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던 노동요로, 2003년 3월 14일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논농사의 차례에 따라 「모 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논 뜯는 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모심을 무렵에 진천군 용몽리 농요보존회[회장 조평희, 1954년생] 회원 80여 명이 마을 앞 논에 직접 모를 심으면서 시연회를 하고 있다. 기능 보유자로는 이정수[1940년생], 이광섭[1939년생], 박득천[1915년생] 등 세 명이 지정되어 있다.
[조상님의 꿈으로 자리 잡은 천혜의 옥토-전승 배경]
2009년 6월 초하룻날, 덕산읍 인산리 진천과수영농조합 앞 들녘은 덕산읍 마을 사람들, 교수와 함께 현장 실습 나온 학생들,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타 지역 사람들이 어우러져 잔치 마당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자, 동네 사람 여러분, 벼가 시원찮으니까 잘 뭉쳐 주시기 바랍니다. 뭉치세 뭉치세 어기야 이 모판 뭉치세.” 기능 보유자 이정수의 외침과 함께 진천 용몽리 농요 2009년 시연회가 시작되었다.
꺼멓게 그은 얼굴에 흰 무명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맨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베잠방이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논물에 발을 담그고 서서 “뭉치세 뭉치세 어기야 이 모판 뭉치세” 하는 뒷소리를 우렁차게 받았다.
손으로는 부지런히 모판에서 모를 쪄 내어 볏짚으로 단을 묶어 너른 논 여기저기 던져 놓았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맛이 좋기로 유명한 ‘생거진천쌀’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진천 용몽리 농요는 생거진천쌀의 집산지라 할 수 있는 덕산읍 일대의 대월들, 목골들, 옥골들에서 오래전부터 농부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부르던 소리이다. 진천군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덕산읍은 대부분이 100m 이하의 평지인 데다가 중앙에 금강(錦江)의 한 줄기인 미호천(美湖川)이 흐르고 있어, 이 유역에 형성된 넓은 들은 비옥한 토질, 넉넉한 수량, 농사짓기에 적절한 날씨 등 천혜의 조건을 갖추어 진천쌀의 주산지로 꼽힌다.
용몽리는 덕산읍 소재지로 안꿈마을[일명 몽촌], 시장마을, 묘봉마을, 용소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진천군 소답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소마을의 ‘용’자와 몽촌의 ‘몽’자를 따서 용몽리라 하였다.
용소마을은 약 200년 전 마을 앞 논에 있던 큰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안꿈마을은 1611년 마을이 큰 수해를 입자 순당(蓴塘) 채진형(蔡震亨)이 꿈을 꾸고 지금의 마을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런 마을의 유래에 비추어 볼 때 용몽리의 자연마을 형성은 16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진천 용몽리 농요 역시 마을의 오랜 역사적 연원에 맞추어 그 전승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으리라 여겨진다.
[노래 부르며 일하다 보면 힘든 줄 몰랐어요-노래의 구성]
진천 용몽리 농요는 논농사의 시작에서부터 한 해 농사의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이어진다. 윤기 흐르는 맛좋은 생거진천쌀을 쌀 포대에 담기까지는 좋은 볍씨를 골라 잘 갈무리해 두었다가 음력 4월경 볍씨를 못자리에 뿌리고 5월경 못자리에서 모를 쪄 내어 모를 심으며 6월경부터는 잡초를 호미로 매고 손으로 뜯고 추석 전후에 수확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용몽리 사람들은 「모 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논 뜯는 소리」 등을 부른다. 이런 소리들이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었고, 그랬기에 하루 종일 논에 엎드려 모를 심고 논을 매면서도 고단한 줄 모르고 오히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모를 심다 말고 모춤을 쥔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모 옆에 자라나는 잡초를 엎기 위해 호미질을 하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던 것은 바로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용몽리 사람들은 “노래 부르며 일하다 보면 힘든 줄 몰랐어요.”라고 입을 모은다.
「모 찌는 소리」는 못자리에 심어 놓은 모를 논에 옮겨심기 위해 적당한 크기의 단[모춤]으로 묶어 내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용몽리에서는 “뭉치세 뭉치세 어히야 이 모판 뭉치세” 하는 ‘뭉치세 소리’를, 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여러 사람이 뒷소리로 받는 선후창 형식으로 부른다.
「모심는 소리」는 모춤에서 모를 하나씩 빼내어 논에 심으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용몽리에서는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하는 후렴의 ‘하나 소리’를, 역시 선후창 형식으로 부른다.
모를 심고 난 뒤 한 20일 지나면 잡초를 매기 시작하는데, 용몽리에서는 초벌에는 호미로 매며, 재벌[이듬]과 세벌은 손으로 뜯는다. 그래서 초벌 매는 소리는 「논매는 소리」라 하고, 재벌과 세벌 매는 소리는 「논 뜯는 소리」라 해서 구별한다.
「논매는 소리」는 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여러 사람이 “어 오허이 예하오 오” 하는 여음을 뒷소리로 받는 ‘오호 소리’를 선후창 형식으로, 「논 뜯는 소리」는 “오오올럴 상사데야” 하는 후렴을 뒷소리로 받는 ‘상사 소리’를 선후창 형식으로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진천 용몽리 농요는 넓은 논에서 집단 노동을 할 때 부르는 논농사 소리의 가창 방식인 선후창의 정형을 잘 보여 주며, 논농사의 과정마다 다양한 소리를 풍부하게 엮어 구성해 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용몽리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불렀던 노래가 이 네 가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논을 갈며 「소 모는 소리」도 불렀고, 물을 뿜으며 「용두레질 소리」도 불렀고, 수확의 과정에서 「개상질 소리」·「도리깨질 소리」·「키질 소리」·「말질 하는 소리」 등도 불렀다.
그러나 이들 노래는 현재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진천 용몽리 농요에는 넣지 않아서 용몽리 농요의 구성에 들어간 노래들은 잘 전승되고 있으나, 그 나머지 노래들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기능 보유자들의 먼 기억에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농사에 대한 자부심과 삶에 대한 여유-노래 사설의 특징]
1. 「모 찌는 소리」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여보시오 농부님 이내 말씀 들어 보소/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천하지대본은 농사지대본 농사 한 철 지어 보세/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높은 데 가면 밭이 되고 깊은 데 가면 논이 되니/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생거진천 넓은 들에 여기저기다 모를 심고/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중략)
잘두 하네 잘두 하오 우리 농부님 잘두 하오/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먼 데 사람 듣기 좋고 앞뒤 사람 보기 좋네/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이 농사를 지어서 부모님 전에 공양하고/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나라님께 조공 바쳐 만백성을 살려 보세/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상사부사가 농부산데 농사일이 상사로세/ 뭉치세 뭉치세 여이하 이 모판 뭉치세”
진천 용몽리 농요에서 가장 먼저 부르는 「모 찌는 소리」의 한 대목이면서, 진천 용몽리 농요에 두루 나타나는 사설이다. 진천 용몽리 농요에는 다른 지역 논농사 소리와는 달리 주로 농사일에 대한 자부심,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공양, 처자식에 대한 부양, 일하는 농부들에 대한 격려 등 교훈적이고 긍정적인 사설이 많이 나온다.
용몽리 농요 창자들은 “초가삼간 집을 짓고 이 형제가 화목하고 동네에서 우애 좋고 또 이런 소리가 거기 들어가는데 우리 좋은 소리를 하려고 하지 나쁜 노래는 안 해유.” 하며, 용몽리 농요 사설에 되도록 좋은 사설을 넣으려고 애쓴다고 한다.
이렇듯 진천 용몽리 농요 사설은 유교에 바탕을 둔 관념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이 많은데, 남녀 간의 사랑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세 한탄, 주인집 양반에 대한 풍자나 비판 등이 많이 나오는 다른 지역의 사설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충청북도 지역 농업 노동요의 사설이 대체로 상생과 화합을 지향하는 긍정적 정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하는데, 예로부터 충청북도 지역이 양반 고을로서 예와 질서를 중시했던 사람들의 심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진천 용몽리 농요가 모두 교훈적인 사설로만 일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진천 용몽리 농요 사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일 년 열두 달 절기에 따라 농사일과 일상생활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달거리 노래」의 사설을 차용해 앞소리 사설에 엮어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달거리 노래」의 사설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노래 부르는 사람의 정서를 잘 융합하여 재창조해 내고 있다.
2. 「모심는 소리」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삼월이라 삼짇날은 제비는 옛집 찾고/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홍안 기러기 무정 배필 기러기도 옛집 찾는데/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무정하구 야속한 님은 내 집 찾을 줄 왜 모르나/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삼월달에 농사일은 보리밭 관리가 제일이고/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사월이라 초파일은 석가모니 탄일인데/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집집마다 등을 달고 자손 발원 하건마는/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임 없는 이 세상 어이 할꼬/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사월달에 농사일은 못자리 관리가 제일이요/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오월이라 단오절은 추천하는 명절이라/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
「모심는 소리」의 일부이다. 삼월 삼짇날 제비가 집을 찾아오는 데서 자신의 외로움을 돌이켜보고 사월 초파일에 집집마다 자손 발원을 하는 데서 임 없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그에 몰입하지 않고 각 절기마다 해야 할 보리밭 관리, 못자리 관리 따위의 농사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슬픔과 거리를 두고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바로잡고 있다.
그 가운데 “깐깐 오월 다 지나구 비껀 유월이 돌아온다”, “비껀 유월 다 지나구 어정 칠월이 돌아온다”, “어정 칠월이 다 지나구 동동 팔월이 돌아온다”와 같은 구절들은 농사짓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계절에 대한 표현으로서, 농사일에 따라 농부들의 생활과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아주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3. 「논매는 소리」
“어 오허이 예하오 오
늙어 죽어 서러운데 모양조차도 늙어 간다/ 어 오허이 예하오 오
장대같이나 곧은 허리 질마가시 되어 가고/ 어 오허이 예하오 오
거울같이 밝던 눈은 반장님이 되어 간다/ 어 오허이 예하오 오
샛별같이 밝던 귀는 절벽강산 되어 가네/ 어 오허이 예하오 오
지팡이를 짚었으니 수명장수 하려는가/ 어 오허이 예하오 오
묵묵히도 앉았으니 부처님이 되시려나/ 어 오허이 예하오 오
가는 세월 붙잡고 오는 백발 막아 보세/ 어 오허이 예하오 오
오는 백발 막으려고 십리 밖에 가시성 쌓으니/ 어 오허이 예하오 오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찾아오네/ 어 오허이 예하오 오”
「논매는 소리」의 일부이다. 위 소리의 마지막 부분인“오는 백발 막으려고 십리 밖에 가시성 쌓으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찾아오네”라는 내용에서 가사 「백발가」에 나오는 백발 사설을 차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우탁(禹倬)의 시조도 연상된다.
이들 가사와 시조는 양반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면서 부르던 것인데 용몽리 농요 창자들에 의해 노동의 현장에 삽입되어 노동의 가락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이는 용몽리 농요가 노동의 고달픔과 서글픔에 빠져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거리를 두고 관조하며 넉넉하게 웃어넘길 줄 아는 미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면서 용몽리 농요의 수준과 격조를 한층 더 높이는 요소가 된다.
4. 「논 뜯는 소리」
“오오올럴 상사데야
이 농사를 지어서 부모님 전에 공양하고/ 오오올럴 상사데야
나라님께 조공 바쳐 만백성을 살려 보세/ 오오올럴 상사데야
상사부사가 농부산데 농사일이 상사로세/ 오오올럴 상사데야
높은 데 가면 밭이 되고 깊은 데 가면 논이 되니/ 오오올럴 상사데야
우리 농부들 노력하면 태평성대 이루리라/ 오오올럴 상사데야
천증세월 인증수요 춘민건곤이 복만가라/ 오오올럴 상사데야
좋은 음식 쉬어지면 수챗구멍 차져 가고/ 오오올럴 상사데야
곱고 곱던 비단옷도 떨어지니 걸레일세/ 오오올럴 상사데야
이십 안쪽 홍안 얼굴도 늙어지니 백발이라/ 오오올럴 상사데야”
진천 용몽리 농요의 마지막 단계에 부르는 소리는 「논 뜯는 소리」이다. 「논 뜯는 소리」는 “오오올럴 상사데야”를 뒷소리로 부르며 역시 다양한 사설을 앞소리로 부른다. 이때 「논매는 소리」의 사설과 비슷하면서도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금쪽같은 명언들과 농부들을 격려하는 교훈적 사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진천 용몽리 농요는 이렇듯 농사에 대한 긍지와 농사짓는 사람들의 자부심을 당당히 드러낸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좋은 옷, 고운 얼굴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는 너무나 자명한 인생의 진리를 되뇌면서 허망하고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만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부모를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 좋고 동네 간에 화목하게 사는 소박한 삶임을, 행복은 멀고 거창한 데 있지 않고 바로 가깝고 작은 것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농사일을 갈수록 경시하고 농촌을 떠나 가족이 점점 해체되어 가는 현재 우리 사회의 세태를 걱정하고 이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값진 경고로도 들린다.
[조화와 변형을 통해 이루어 낸 창조성과 향토성-의의와 가치]
진천 용몽리 농요는 넓은 평야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노동요로서 논농사 소리의 전형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충청도 지역이 자리하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중부 지역과 동부 지역, 남부 지역의 소리가 적절하게 융합되면서 진천 지역만의 개성적 소리로 탄생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모심는 소리」로 부르는 ‘하나 소리’는 “야기도 허 하나 어하 저기도 또 하나”라는 후렴을 뒷소리로 해서 선후창 방식으로 부르는데, 이는 경기도 지역의 대표적인 「모심는 소리」의 후렴으로서, 충청북도에서는 진천군 일대와 음성군 일부에서 전승되고 있다.
「논 뜯는 소리」로 부르는 ‘상사 소리’는 “얼럴럴 상사데야” 하는 후렴을 뒷소리로 해서 선후창 방식으로 부르는데, 남부 지역에서 흔히 「모심는 소리」로 많이 부르던 것을 「논 뜯는 소리」로 변형하여 부르면서 재창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충청북도 다른 지역에서 흔히 ‘방아 소리’를 「논매는 소리」나 「논 뜯는 소리」로 부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진천 용몽리 농요의 개성적 면모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심는 소리」나 「풍장 소리」로도 부르는 「초평 아리랑」이나 「청주 아리랑」의 경우, 가락이 「정선 아라리」와 비슷하면서도 변형된 후렴과 가락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천 용몽리 농요는 주변의 소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이를 변형하여 독특한 진천의 소리로 재창조해 낸 민요의 창조성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용몽리 농요에는 지역의 전설이나 다른 갈래의 민요도 자연스럽게 삽입되어 지역적 향토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방골 큰애기 소리」나 「초평 아리랑」, 「달거리 노래」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음의 「방골 큰애기 소리」는 방골 정씨의 딸과 초평 경주이씨의 아들이 혼인하던 날, 신랑의 사모에 사모뿔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본 신부가 그대로 혼절하여 죽었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당시 풍습에 초혼에만 신랑이 사모뿔을 두 개 꽂고 재혼에는 하나를 꽂았는데, 신랑이 실수로 사모뿔을 빠뜨린 것을 신부가 오해했던 것이다.
“진천에 방골 큰애기는 납채를 받구서 죽었다네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납채를 받아서 염습하고 잔치술 가지고 군정 주네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대사를 볼려고 오신 손님 장사를 보구서 눈물짓네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진천에 방골 큰애기는 연지에 곤재에 분 바르고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꽃가마 타고서 시집갔지 상여를 타고서 떠나가네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진천에 방골 큰애기는 초례청 고혼이 웬 말이가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이구나 어머니 나 죽거든 인산말 뒷산에 묻어 주오
아리아리 스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용몽리 농요 창자들은 이 「방골 큰애기 소리」를 「초평 아리랑」의 앞소리로 따로 부르기도 하다가 용몽리 농요의 「모 찌는 소리」나 「모심는 소리」의 앞소리 사설로 부르기도 한다.
「초평 아리랑」은 진천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아리랑으로 시집살이하는 여자들의 한탄 같은 다양한 내용의 사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그대로 모를 심을 때 갖다 부르기도 한다.
「달거리 노래」는 정월부터 섣달에 이르기까지 매월 시기에 맞춰 해야 하는 농사일이나 명절에 절기 음식을 해 먹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노래로서, 이 또한 용몽리 농요에서 「모 찌는 소리」나 「모심는 소리」의 주요 사설로 불리고 있다. 가사 「백발가」도 용몽리 농요의 「모심는 소리」나 「논매는 소리」의 앞소리 사설로 불린다.
이러한 양상은 진천 용몽리 농요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창작·전승되면서 구비 문학과 기록 문학의 다양한 원천을 받아들여 소리를 풍부하게 가꾸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다른 어떤 지역의 농요보다도 다양성과 창조성, 향토성에 있어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