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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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午軍亂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영준 |
[정의]
1882년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 및 일행을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던 인천부 청사로 도망치게 만든 사건.
[개설]
임오군란 은 1882년(고종 19) 7월 23일에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 급료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난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와 그 일행은 난을 피해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인천부 청사로 피신했다가 다시 제물포를 거쳐 월미도까지 도망쳤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후반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민씨 정권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식 군사 제도를 도입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881년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비롯한 군영들을 무위영(武衛營)[대궐을 지키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종래의 무위소와 훈련원을 합쳐 만듦]과 장어영(壯禦營)[총융청, 금위영, 어영청을 합하여 만든 군영(軍營)]으로 축소시키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그런데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급료도 제대로 나오고 의복 및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구식 군대의 병사들은 봉급미도 정상적으로 지급받지 못하는 등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882년 7월 19일에 전라도 세곡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정부는 13개월씩 밀려 있는 급료 중 한 달치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봉급미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양도 규정에 못 미칠 정도로 적었다. 결국 이 일이 발단이 되어 군란이 발생하게 된다.
[경과]
군란을 일으킨 군병 집단은 처음에는 등소(等訴)[연명으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함]를 통해 비폭력적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저택을 부수고 무력행사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운현궁(雲峴宮)으로 가서 흥선 대원군을 찾아갔다. 이들은 정부의 회유도 거부한 채 3개 대대로 나뉘어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여기에 정부에 불만을 품은 하층민들도 합세하여 점차 군병 집단의 규모가 커져 갔다. 이때 하층민들은 경기 감영을 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일본 공사관에 있다가, 군병들과 하층민들의 공격을 받고 탈출하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부 청사에 도착하였다. 하나부사 일행은 인천부 부사 정지용에게 환대를 받고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명령을 받은 인천부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호위하던 순사 등 3명이 죽고, 일행은 제물포로 도망쳤다. 이후 하나부사는 다시 제물포에서 월미도로 도망쳐 일본군의 보호를 받았다.
[결과]
임오군란 은 서울 시내와 왕궁을 휩쓸었으며 결국 고종이 대원군의 집권을 승인하고 대원군이 그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 정권이 들어선 것을 알게 된 일본과 청나라는 각기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청나라가 8월 25일에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원군을 납치하고, 8월 29일에 도시를 장악한 군병들과 하층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임오군란은 끝나게 된다. 일본과는 일본인들의 보상 문제를 빌미로 음력 8월 30일에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된다.
임오군란 은 개항기에 수구과 개화의 대립에서 발생된 사건으로 민씨 정권의 성급한 개화 정책 및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었다고 하겠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인천부로 피신한 것은 인천이 개항지로서 일본의 세력이 미치고 있는 곳이었고, 또 배를 통해 일본으로 가기도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나부사가 피신했던 인천부 청사에는 이를 기념하는 ‘하나부사 조난지비’가 세워졌고, 이 비는 현재 인천 시립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