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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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志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개항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무신.
[개설]
정지용(鄭志鎔)[?~1882]의 가계와 출생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880년(고종 17)부터 1882년(고종 19)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설치되었던 인천도호부에서 부사를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정지용은 1873년(고종 10)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여 1875년(고종 12) 울산부에서 발생한 난동 무리들을 타일러 해산하였는데, 일의 진행이 나약하였다 하여 파직의 위기를 겪었다. 또한 정지용은 1880년(고종 17)부터 2년간 인천 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재임 시 임오군란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일본 공사관이 포위되자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년~1917년]는 6월 6일 공사관에 불을 질러 기밀 서류를 태운 후 관원과 함께 서울을 탈출하였다. 양화진(楊花津)[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을 거쳐 인천도호부에 도착하였는데 군란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던 인천 부사 정지용과 차비 역관(差備譯官)[특별한 일을 맡기 위해 임시로 임명된 통역관] 고영희(高永喜)는 일행을 맞이하여 환대하였다. 그러나 군란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정의길(鄭義吉) 등이 뒤쫓아 와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비밀 명령을 전달하자 인천부의 병사들이 출동하여 이들을 포위 습격하였다. 하나부사 일행은 월미도(月尾島)로 숨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배를 빌어 타고 나아가다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인 영국 선박에 구조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일화를 알려주는 ‘화방 공사 일행 조난지비(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가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석은 좌우 양쪽을 인위적으로 파손하였기 때문에 내용의 앞뒤가 생략되어 정확한 전후의 파악은 어려우나 6명 정도의 피난 일행의 명단과 정지용이 흥선 대원군의 소환 때 죄를 알아 스스로 자살했다는 내용이 약간 언급되어 있다.
정지용은 1882년(고종 19)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되었으나 일본과의 화통(和通)에 반대하는 장계(狀啓)[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를 올리고 자살하였다. 정지용은 장계에서 “지금 일본과 화통하고 있지만 나라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허실과 형편에 대하여 저들은 벌써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호 조약을 맺으려는 그 속셈은 전적으로 피 흘리는 전쟁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를 빼앗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이 지역을 지킨 3년간 힘든 부담이 더없이 심하였습니다. 군사는 400명도 차지 않는데다가 예리한 무기나 전곡(錢穀)도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어떤 변고가 터지기만 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큰 화란이 일어나 단번에 곧바로 쳐들어온다면 누가 그들을 막아내겠습니까? 신은 임금을 섬기는 몸으로서 그 독한 칼날을 받아 임금을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오늘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소서.”라고 상소하였다. 고종은 “정의를 지키려는 그 마음은 탁월하다 하겠으나, 일이 터지기 전에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그저 시끄러운 소문만 더 퍼지게 할 뿐이다. 영구(靈柩)를 고향으로 운구하는 방도는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특례(特例)로 하라고 분부하라.”라고 전교(傳敎)[임금이 명령을 내림. 또는 그 명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