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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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嚴世永 |
이칭/별칭 | 윤익(允翼),범재(凡齋),숙민(肅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오정윤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영월(寧越)이며, 자는 윤익(允翼), 호는 범재(凡齋), 시호는 숙민(肅敏)이다. 아버지는 엄석풍(嚴錫豊), 할아버지는 엄저(嚴著), 증조할아버지는 엄사건(嚴思健)이며, 외할아버지는 이원달(李源達)이다.
[활동 사항]
엄세영(嚴世永)[1831~1900]은 1864년(고종 1)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에 병과(丙科) 13위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부사정(副司正)으로 출사하였다. 1866년(고종 3)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남학(南學)[조선 시대 한양 남쪽에 있던 국립 교육 기관인 사학(四學)의 하나] 교수(敎授)·부사과(副司果) 등을 역임하고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에 파견되었다. 엄세영은 1868년(고종 5)에는 종친부(宗親府)[조선 시대에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화를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반(宗班)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정(正)·분승지(分承旨), 1874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1875년(고종 12)과 1878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엄세영은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修信使)[개항 후에 일본에 보낸 외교 사절]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와 김홍집(金弘集) 등이 일본의 근대 문물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1881년(고종 18) 2월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엄세영은 이때 파견된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 12명의 전문 위원 중 1명으로 4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사법성(司法省)을 시찰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엄세영은 이 경험으로 귀국 후 경리 통리기무아문 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의 율례사 당상(律例司堂上)을 역임하였다.
엄세영은 1882년(고종 19)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한성부 좌윤(左尹)·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고,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는 청군 영접관(淸軍迎接官)으로 활동하였다. 엄세영은 1883년(고종 20)에는 한성부 우윤·이조 참판·예조(禮曹) 참판, 1884년(고종 21)에는 한성부 좌윤·반접관(伴接官)[다른 나라 사신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을 역임하였다. 엄세영은 1884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묄렌도르프와 함께 거문도를 조사하고 일본에 파견되어 교섭하였다. 1888년(고종 25)에는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 겸 인천 부사(監理仁川港通商事務兼仁川府使)를 지냈다.
엄세영은 1890년(고종 27)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한성부 우윤, 1891년(고종 28)에는 형조(刑曹) 참판·한성부 좌윤·병조(兵曹) 참판, 1893년(고종 30)에는 사헌부 대사헌·병조 참판·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894년에는 위해 삼남(三南)[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염찰사(廉察使)와 호남(湖南) 선무사(湖南宣撫使)[조선 시대에 큰 재해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왕명을 받들어 재난을 당한 지방의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로 임명되어 민심의 수습과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도하였다. 당시 엄세영의 업적을 기리는 ‘관찰사 엄상국 세영 불망비(觀察使嚴相國世永不忘碑)’가 경상북도 구미시의 선산 읍성 남문 앞에 조성된 비석군(碑石群)에 남아 있다.
염세영은 김홍집 내각에서 농상아문 대신(農商衙門大臣)·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대한제국 시기에는 중추원 일등 의관(中樞院一等議官)·경상북도 관찰사·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엄세영의 저서로는 『일본 문견록(日本聞見錄)』, 『일본 문견 별단초(日本聞見別單草)』, 『일본 사법성 시찰기(日本司法省視察記)』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