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6 |
---|---|
한자 | 鄭淵 |
이칭/별칭 | 중심(仲深)│송곡(松谷)│정숙(貞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화 |
[정의]
조선 전기에 인천광역시 지역을 세거지로 하는 인천 채씨 문중 사위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심(仲深), 호는 송곡(松谷)이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홍(鄭洪)과 오중선(吳仲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가는 인천 채씨 일가이며,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장인이기도 하다. 아들로는 정자원(鄭自源), 정자양(鄭自洋), 정자제(鄭自濟), 정자숙(鄭自淑)이 있다.
[활동 사항]
정연(鄭淵)[1389~1444]은 태종 5년(1405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 1414년 노비에 대한 쟁송(爭訟)과 관련하여 당시 수상이던 하륜(河崙)을 탄핵하다가, 오결로 판명되어 순금사(巡禁司)에 넘겨져 국문을 받았다. 속전(贖錢)[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내고 풀려난 이후, 도관(都官), 정랑(正郞)을 거쳐 종부시[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 소윤(宗簿寺少尹)이 되었다. 정연은 1419년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오르지만, 1420년 상왕인 태종이 철원에 가려는 것을 간하다가 진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1424년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1426년에는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1427년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제수되었다. 1429년 안평 대군 이용이 정연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우부대언(右副代言)을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정연은 1430년에는 천추사(千秋使)[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황후·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신]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931년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1432년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1435년에는 인순 부윤(仁順府尹), 1436년에는 형조(刑曹)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442년 다시 사은 겸 주문사(謝恩兼奏聞使)[사은사는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국의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이며, 주문사는 동지사(冬至使) 이외에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가 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또한 사복시(司僕寺)[조선 시대에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제조(提調)를 맡아보며 오랫동안 마정(馬政)을 관리하였는데, 그 처리하는 것이 세밀하고 충실하였다고 전한다. 1444년 병이 위독하게 되자, 임금이 내의를 보내 치료케 하였으나 끝내 사망하게 되니, 이때의 나이가 56세이다.
[상훈과 추모]
1444년 정연이 죽자, 시호(諡號)를 정숙(貞肅)이라 하였는데, 곧은 길을 지켜 동요하지 않는 것을 정(貞)이라고 하고, 마음을 굳게 잡고 결단하는 것을 숙(肅)이라 하기 때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