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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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답판(踏板),도판(跳板),초판희(超板戱),판무(板舞)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서종원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정초에 행하는 여자아이들 놀이.
[개설]
답판(踏板), 도판(跳板), 초판희(超板戱), 판무(板舞)라고도 불리는 널뛰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해지는 놀이이며 특히 정초에 주로 여성들이 즐겨하였다. 두 사람이 널의 양쪽 위에 서서 서로 균형을 잡아가며 발을 굴러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놀이다.
[연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행해지는 널뛰기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으나 매우 오래전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성종(成宗) 때,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여염집 부녀자들이 몇 자 높이로 올라가며 패물 올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데, 이를 ‘초판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황(周煌)의 『유구국 기략(琉球國記略)』에는 유구의 부녀자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추는 것을 ‘판무’라 하는데, 조선 초에 유구인들이 조선에서 배워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통해 고려 시대에도 널뛰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향토 오락』에서도 널뛰기의 역사를 “고려 시대부터 전래되어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순조(純祖) 때 이낙하(李洛下)가 지은 「답판사(踏板詞)」에는 널뛰기를 답판 놀이라 하며, 정초부터 2월까지 노는 놀이로 높이 솟을 때는 3척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 이외에, 구술 자료로 널뛰기의 유래가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옛날 죄를 지은 두 남자가 옥 속에 갇혀 있었다. 두 남자의 부인 중 한 사람이 옥에 갇혀 있는 자기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 다른 죄인의 아내와 공모하여 널을 뛰면서 담장 너머 옥에 갇혀 있는 남편들의 얼굴을 엿보았다고 한다. 둘째, 옛날에 담장 안에 묶여 있던 부녀자들이 세상 밖을 보고 싶어서 널뛰기를 하여 몸이 공중으로 높이 솟을 때 담장 밖의 세상 풍경과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았다고 한다. 셋째, 널을 뛰면 시집가서 아기를 잘 낳는다고 한다. 반대로 처녀 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한다. 넷째,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일 년 동안 발에 가시나 못이 찔리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섯째, 귀신을 쫓기 위해서 널을 뛴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널뛰기 를 하기 위해서는 널[널빤지]과 볏짚이 필요하다. 널은 길이가 4~6m 정도, 너비가 60~80㎝ 정도의 나무판을 사용한다. 볏짚은 널의 하단에 놓는 것으로, 두 사람이 균형을 맞춰 뛸 수 있도록 널빤지 중앙에 놓는다. 널뛰기는 주로 정초에 여성들이 즐겨하던 놀이로 놀이 공간은 주로 집안의 마당이었다. 정초에 자유롭게 외부에 출입하기 힘들었던 여성들이 윷놀이와 함께 집안에서 즐길 수 있었던 대표적인 놀이인 만큼 집안에서 주로 자매 혹은 이웃집 여자들끼리 모여 행하였다. 놀이 과정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널의 중앙에 남자 아이를 앉도록 하기도 하였다.
[놀이 방법]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행해졌던 널뛰기는 두 사람이 널빤지 양 끝에 서서 번갈아가며 서로 높게 뛰어오르는 놀이다. 높게 뛰어오르는 과정에서 혹여 다치는 경우가 있어 널을 뛰는 사람 옆에서 손을 잡아 주는 경우도 있으며, 집안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빨랫줄을 잡고 널을 뛰는 경우도 있다. 널뛰기는 누가 더 높게 올라가는지를 판단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도움을 받아 하늘 높이 힘껏 뛰어올라야만 한다.
[현황]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행해지는 널뛰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놀이 문화라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전승이 약화되긴 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일부 문화 체험 공간에서 이 놀이가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