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 > 미추홀구향토문화백과 > 삶의 내력(역사) > 근현대 > 근대
개항기
-
1871년 미국이 조선에 침범함으로써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무력 침략한 사건이다. 주청 전권 공사 F. F. 로우(F. F. Law)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 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J. Rodgers)는 군함 5척...
-
1882년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 및 일행을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던 인천부 청사로 도망치게 만든 사건.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7월 23일에 구식 군대가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 대우, 급료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난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와 그 일행은 난을 피해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
-
1882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일본 공사가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에 머물다가 병사들에게 습격당한 사건. 1882년 7월 19일 훈련도감(訓練都監) 군인들이 난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고 일본공사관을 포위·공격한 사건을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13개월이나 밀렸던 급료로 받은 쌀이 정량이 아닌데다가 대개는 물에 잠겨...
-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리서로 이송된 김구가 1898년 탈옥한 사건.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김구(金九)[1876~1949]가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타살했다. ‘치하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날의 사건은 김구가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목적으로 명성 황후를 살해한 일본인, 혹은 범행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왜구(倭寇)’ 한 명이라도...
-
1905년과 1906년에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 개간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발생한 분쟁. 일본인 마츠다 코조[松田行藏]이 1905년 2월 한국인 이희열의 명의를 빌려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에 대한 개간 특허권을 획득한 후,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에게 양도하려 하였다. 한국 정부가 개간 특허...
일제 강점기
-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통치를 강압적으로 행사하던 시기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역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도의 위치·관할 구역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 구역」 변경에 따라 새로 신설된 부천군 다주면과 부천군 문학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용현동·도화동·주안동이 부천군 다주면에...
-
1919년 3월 27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거족적인 민족 운동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서는 이보경, 이무경, 오주선, 최선택, 이창범, 이재경, 이상태, 최개성 등이 주동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6일, 지금의 인천...
-
일제 강점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이 속했던 행정 구역 명칭.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일제는 종전까지 군(郡)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던 지방 행정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 행정력이 지방 하부 단위까지 미칠 수 있도록 면(面) 중심의 지방 행정 체제 개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10년 「조선 총독부 지방관 관제」와 「면에 관한 규정」을 공포해 면을 최하급 행정...
-
일제 강점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공장이 세워진 방직 회사. 인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직 공장이었던 동양 방직(東洋紡織)은 1930년대 초에 세워졌으며, 일본에 본사를 두고 경성의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공장을 두었다. 광복이 되고 나서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가 1948년에 동양 방적 공사로 바뀌었다. 이때 공장장인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귀속된 적산 기...
-
1908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일본인 이와사키 히사야가 창업한 농원. 1915년에 발간된 『인천 향토 사료 조사 사항(仁川鄕土史料調査事項)』에 따르면 일본인 대부호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는 당시 인천부 다소면 용현정동[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인천 출장소를 설치하고 1908년 7월, 6만 원을 투자하여 동산 농원을 창업하였다. 본점은 도쿄시 본고우쿠 유지마...
-
일제 강점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과 도화동 일대에 있었던 농원. 동일 농원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에 걸쳐 있었던 농원이다. 운영한 사람은 김주하로, 주로 배를 재배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와 주변 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과수원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수원들로는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
-
개항기인 1906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가 창업한 농원. 평산 농원(平山農園)은 창업자인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히라야마 마츠다로가 1906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해당하는 인천부 다소면 비룡리에 투자액 2만 6500원으로 창업한 농원이며 복숭아, 포도, 사과, 배, 앵두, 감, 밤, 호두...
-
일제 강점기 동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 1910년 경술국치라 일컫는 한일 병합 조약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19년 3·1 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학생 주도의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