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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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胄 |
영어공식명칭 | Park Joo |
이칭/별칭 | 대지(大之),모와(慕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병련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 박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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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609년 - 박주 순효로 정려 |
추모 시기/일시 | 1710년 - 박주 정려각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78년 - 박주 모와재 건립 |
출생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거주|이주지 | 창녕 -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
사당|배향지 | 모와재 -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
성격 | 문신|효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밀성[밀양]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가계]
박주(朴胄)의 본관은 밀성(密城)[밀양]이며, 자는 대지(大之), 호는 모와(慕窩)이다. 1546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박주는 송은 박익의 후손이자 우당 박융의 6대손이며 통찬 박문손(朴文孫)의 현손이다. 박주의 할아버지는 지평 박밀(朴密)이며, 아버지는 정자 박숭례(朴崇禮)이다. 아들은 판관 박맹원(朴孟元)과 현감 박맹하(朴孟夏)이다.
[활동 사항]
박주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효우충신(孝友忠信)하였다. 21세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이산군수(理山郡守)로 재직할 때에는 여러 가지 공무를 공평정대하게 처결함으로써 고을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민관(牧民官)이라 칭송하여 청정비(淸政碑)를 세웠다고 한다.
박주는 소년 시절부터 성품이 따스하고 선량하며, 항상 부모의 뜻에 따랐고 공경을 다하여 뜻을 받들어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에 들었을 때는 곁에 앉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생전과 같이 산소를 살피며 6년을 시묘(侍墓)하였는데, 밤마다 범이 내려와 보호하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매달 강을 건너 만나러 갔는데, 효성에 감동한 사공이 늘 배를 대고 기다렸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박주는 1609년(광해군 원년) 순효(純孝)로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1710년(숙종 36)에 박주가 살았던 창녕 부곡에 정려각을 세웠다. 1903년 정려각이 화재로 소진된 후, 1909년 밀양 고등법원으로 환고(還故)한 후손들의 청원에 의하여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효자봉훈랑이산군사박주지려(孝子奉訓郞以山郡事朴冑之閭)’를 세웠다. 고법리에 1978년에 모와재(慕窩齋)를 건립하여 해마다 추모한다. 기문은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