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74
한자 崔大福
영어공식명칭 Choe Daeb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대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8월 18일연표보기 - 최대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최대복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3·1운동 관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일 - 최대복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19일 - 최대복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 선고
추모 시기/일시 2017년연표보기 - 최대복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부평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최대복(崔大福)[1892~?]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에서 태어났다. 부평리 3·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민족 대표들의 3·1 독립 선언 소식을 접한 봉선사 승려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강완주(姜完珠), 서울에서 약종상을 하고 있던 김석로(金錫魯) 등은 1919년 3월 29일 문건을 작성하여 부평리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배포된 문건의 명의는 ‘조선 독립단 임시 사무소’였으며,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듯하므로, 이러한 기회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대복이순재 등이 배포한 문건에 영향을 받아 부평리 광릉천 일대의 시위를 처음으로 결의하고 구체화한 이재일(李載日)최영갑(崔永甲)·최대봉(崔大奉)·양삼돌(梁三乭)·유희상(柳熙庠)·박석몽(朴石夢) 등과 함께 1919년 3월 31일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시위는 일본 헌병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이에 따라 최대복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았다. 최대복은 공소하여 1919년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고, 형을 받은 뒤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최대복에게 201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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