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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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奇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시대 포천 지역에 있었던 교통 통신 기관.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왕래하는 관료나 사신들을 접대하고 공문서를 전달하며 관수 물자를 운반하던 교통통신 기관 중 하나로, 안기역(安奇驛)은 포천 지역에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포천현 역원조(驛院條)에는 “안기역은 현 북쪽 4리에 있다[安奇驛 在縣北四里]”라고 하였다. 또한 윤지(尹漬)가 중수하자 성현(成俔)이 이를 기념하여 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빠졌는데, 지금은 집이 날 듯하네. 깎고 새긴 것이 합당하여 장대하고 아름답다. 한갓 보기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오는 손님이 돌아가기 잊었네. …… 이 마판에 말이 많아서 구름같이 성하도다[昔則雨墊 今則翬飛 允符剖劂輪奐有輝 非徒觀美 客之忘歸 …… 斯藏其多雲盛]”라고 하였다.
[내용]
안기역은 조선 시대 포천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 현의 북쪽 4리 정도에 위치하였다. 1424년(세종 6) 10월과 1426년(세종 8) 10월에 국왕이 행행(行幸) 과정에서 이곳에 머물렀고, 1459년(세조 5) 10월에도 국왕이 포천에서 사냥하면서 머물기도 하였다.
[변천]
안기역은 1424년에 양주(楊州) 녹양역(綠楊驛), 영평(永平) 양문역(梁文驛) 등과 9개 역을 하나로 묶어 은계도(銀溪道)라 하면서 찰방을 설치하였다. 이후 1465년(세조 11)에 녹양역과 안기역·양문역을 평구도(平丘道)로 이관하였는데, 두 명의 찰방으로부터 간섭을 받게 되는 폐단이 있어 1471년(성종 2) 역리(驛吏)의 요청에 따라 다시 예전대로 은계도에 속하게 하였다. 성종 연간에는 윤지에 의해 역원이 중수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역마(驛馬)가 9필(匹), 역노(驛奴)가 15명, 역비(驛婢) 5명이 배속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의 고지도를 보면 인근에 역촌(驛村)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