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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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白 |
이칭/별칭 | 군실(君實)/수우당(守愚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무 |
몰년 시기/일시 | 1649년 - 이시백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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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이시백 은거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
묘소|단소 | 이시백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영동 현감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우당(守愚堂).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영양군이고, 할아버지는 청화군(淸化君)이며, 아버지는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이다.
[활동 사항]
이시백(李時白)[?~1649]은 어려서부터 정직하고 효성스러웠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입에 넣어 드리고 아버지 병을 대신하고자 기도를 드렸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아가 세마와 원외랑(員外郞)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북인(北人) 정인홍 등의 무리가 정권을 전횡하여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인 후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귀양 보내 죽이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패륜 행위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 어진 신하가 쫓겨났다. 이때 이시백의 아버지 이현도 이를 반대하다가 조정에서 축출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에 낙향하였고, 이후 자연 속에 묻히어 독서와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1618년(광해군 10)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지극한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었는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임금을 호종하고 강화도까지 갔다. 1630년(인조 8) 영동 현감으로 나아갔는데, 정직하고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 때문에 주위에서 우직(愚直)한 사람이라 평을 하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포천 정교리로 돌아왔다.
스스로 ‘수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그 이유를 비유하는 시를 지었다. 즉 “생계를 도모함이 너무 졸렬하니 이것이 우(愚)가 아니고 무엇이며, 산수(山水)를 즐기다 보니 지나치게 독점하는 것 같아 이것도 또한 과분한 줄 이제야 알겠노라, 내가 본래 타고난 천성이 우(愚)인 것만 같아 차라리 우(愚)를 지키는 것으로서 당호(堂號)를 삼고 수우(守愚)로서 스스로를 경계하리라.” 하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대궐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행한 후 조상의 사당에 가서 예를 올려 충효를 실천하였다. 인조가 이 일을 전해 듣고 영유 현감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다시 종친부 전부를 제수하면서 만약 이번에도 불응하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임금의 명에 마지못해 사은(謝恩)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1635년(인조 13) 「연한 편람(燕閑便覽)」이라는 10개 조로 된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의 대략은, 첫째 임금은 항상 몸을 닦고 반성할 것, 둘째 정치하는 법을 익힐 것, 셋째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 넷째 씀씀이를 밝게 살필 것, 다섯째 바른 말을 들을 것, 여섯째 상벌을 신중히 할 것, 일곱째 법을 잘 지킬 것, 여덟째 본말(本末)을 지킬 것, 아홉째 용재를 절약할 것 등이었다. 인조가 크게 칭찬하고 충신에 대한 보답으로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세상을 비관하여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포천으로 돌아온 후,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연구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수우당유고(守愚堂遺稿)』가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솔다리 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