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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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白墓-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익성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71년 - 이시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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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시기/일시 | 1649년 - 이시백 묘 조성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49년 - 이시백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885년 5월 - 이시백 묘비 건립 |
현 소재지 | 이시백 묘 및 묘비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
성격 | 묘|묘비 |
양식 | 원형 봉분 합장묘|옥개 방부형[묘비] |
관련 인물 | 이시백(李時白)[1571~1649]|여흥 민씨(驪興閔氏) |
[정의]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백 부부의 묘와 묘비.
[개설]
이시백(李時白)[1571~1649]의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가갔다가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위 사건으로 사직하였다. 병자호란 중에는 감찰로 왕을 강화도로 모셨다. 1630년(인조 8) 충청도 영동 현감(永同縣監)으로 나갔다가 우직(愚直)한 관리라는 평을 받자 사직하고 포천 화산 정교리로 돌아와 우거하며 당호를 수우(守愚)라 하였다.
후에 인조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라는 벼슬을 내렸고, 1635년 상소문 ‘연한 편람(燕閑便覽)’을 올리자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문집 『수우당 유고(守愚堂遺稿)』를 남겼고, 사후에 증손 이필(李苾)이 현달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배위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호군(護軍) 민여충(閔汝忠)의 딸이다.
[위치]
포천에서 국도 43호선을 따라가다 소흘읍에서 가산면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다시 정금교에서 좌회전하면 이시백 묘 및 묘비가 있는 정교리에 이른다.
[형태]
무덤은 이시백과 여흥 민씨를 합장한 원형 단분으로 면석을 돌린 봉분의 방향은 간좌(艮坐)[북동에서 남서를 바라보는 모양]이다. 묘는 1649년 조성되었다.
[금석문]
봉분 우측에 자리한 묘비는 옥개 방부형(屋蓋方趺形)으로 앞면에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행종친부 전부 수우당 이공 휘 시백 지묘 배 숙인 여흥 민씨 부 간좌(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行宗親 府典簿守愚堂李公諱時白之墓 配淑人驪興閔氏祔艮坐)’라 새겼다. 뒷면에는 1885년 5월에 10세손 이사하(李思夏)가 짓고, 이사헌(李思憲)이 쓴 음기가 새겨져 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공은 풍채가 빼어나고 운치가 맑고 밝아, 바라보면 옥산이 높이 솟은 듯하고 얼음담은 병이 맑게 있는 듯하였다. 성품이 또한 청렴하고 지조 있으며 정직하였고, 강개가 많고 절의를 사모하였으며, 말이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의연히 범할 수 없고 확연히 꺾지 못할 기운이 있었다.”
[현황]
일반적인 무덤 형태로 후손들에 의해 정성스레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