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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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馨 |
영어공식명칭 | I Gihyeong |
이칭/별칭 | 맹원(孟遠),성와(惺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11월 5일 - 이기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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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이기형 제1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이기형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29일 - 이기형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8년 1월 24일 - 이기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이기형 건국 포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제1차 유림단 의거 |
출생지 | 이기형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7[대산리 410] |
거주|이주지 | 이기형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
활동지 | 이기형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맹원(孟遠), 호는 성와(惺窩).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1587~1612]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이규희(李奎熙)이다.
[활동 사항]
이기형(李基馨)[1868~1946]은 1868년 11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7[대산리 410]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가학으로 전해지는 학문을 익혀 석학(碩學)으로 이름을 떨쳤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조정의 역적 대신들을 성토하는 여론 환기에 힘썼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하며 구국 방책을 논의하는 등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전개와 함께 독립 선언문이 발표되었으나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 대표는 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곽종석·장석영·송준필(宋浚弼)·김창숙 등이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 장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파리 장서는 프랑스 파리에 보내는 긴 문장의 글이라는 의미인데, 일제가 자행한 불법적인 한국 국권 침탈 과정과 강압적인 지배 통치를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한국 유림을 대표하여 곽종석·김복한(金福漢)·장석영·송준필 등 각지의 유생 137명이 연서하였다. 이기형도 그 서명자들 중 한 사람이고, 각지 유생들의 서명을 받아 김창숙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파리 장서는 상하이에서 파리 강화 회의 의장과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발송되었으며, 중국 정부와 중국 주재 외국 공관 및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이기형은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수천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 등 3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시위대가 흩어졌다.
일제 경찰이 주동자들을 검거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리 장서 운동의 기밀을 알게 되어 장서에 서명한 유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기형도 붙잡혀 심문을 받고 기소된 후 1919년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후 향촌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광복을 맞았으나, 이듬해인 1946년 1월 24일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