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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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繼禧 |
영어공식명칭 | Han Gye-hee |
이칭/별칭 | 자순(子順),문정공(文靖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수진 |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조부는 개국공신이고 영의정을 역임한 한상경(韓尙敬)이고, 아버지는 관찰사를 역임한 한혜(韓惠)이다.
[활동사항]
1435년(세종 17)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441년 진사과에 급제하고, 144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후 7년간을 집현전에서 연구하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자력으로 급제하고 집현전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세조의 두터운 총애를 입고 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맡으면서 경연과 세자의 교육을 맡게된다. 2년 6개월간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인사를 공평무사하게 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경국대전 經國大典』을 편찬하는데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호전(戶典)편찬에는 한계희가 없으면 안된다”고 할 정도였다. 간경도감에서 불서를 번역간행하는데도 남다른 관심과 힘을 쏟아 유학자로서는 드문 활약을 하였다. 이외 의서, 사서 등 도서편찬에도 크게 기여했다. 세조가 “나에게 제일의 신하가 셋 있으니 한계희, 노사신, 강희맹이라” 하였다고 한다. 성종때 좌찬성의 자리에 올랐으나 상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정승 이상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고 국정에 기여하였다.
[묘소]
성종 13년 60세에 죽어 성남의 율동 서근배미 분당저수지 북쪽에 묘를 쓰고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외교와 국방 등의 분야에서 큰 공을 세운 왕족이나 벼슬아치에게 임금이 내려준 논밭]로 받아 그 후손이 세거하면서 ‘한씨촌’을 형성하였다.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그중 사신(士信)의 차남 도정공 한석(韓碩)[1479~?]의 후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