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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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Conflict |
이칭/별칭 | 한국전쟁,6·25사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종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6월 25일 -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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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 의사단 단원 28명, 조선인민군[북한군]에 피살 |
종결 시기/일시 | 1953년 7월 27일 -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 인민지원군 간 정전협정 조인 |
성격 | 전쟁 |
관련 인물/단체 | 의사단|구국결사대 |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까지 경기도 성남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간 벌어진 동족상잔의 전투였다. 여기에 더하여 외국의 군대까지도 참전하여 동서진영 간의 국제전쟁으로 비화됨으로써 남북 평화통일의 길은 더욱 어려워졌다.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지금의 러시아]으로 대표되는 냉전의 시대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는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하여 체제를 달리하는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한반도에서 두 세력이 충돌한 것이 6·25전쟁이었다.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역할을 분담한다는 취지로 설정되었다.
1947년 이후 미·소 간 냉전이 격화하면서 38선 이남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북의 분단은 공식화되었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미·소 양국의 철수를 요구하였는데,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서 먼저 철수하였고, 미국은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터진 이 전쟁은 6·25전쟁, 6·25사변, 6·25한국전쟁 또는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기습 공격한 북한군에 비하여 국군은 일요일인 데다가 농번기 휴가철이라는 안일한 상태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은 3일 만에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는 데에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북한군이 지닌 전투기와 탱크 등의 화력이 국군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었다.
전 국토가 전쟁의 내홍에 휩싸여 있을 때 성남 지역 주민들은 의사단(義死團)을 조직하여 북한군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처 후퇴를 하지 못했던 용산경찰서 순경 장태영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태재고개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 숨어 지내고 있다가, 성남으로 내려온 직장 동료 김정남의 꾐에 빠져 돌마면 분주소[지금의 파출소]에서 부역을 하던 중 의사단 단원이던 류지창에게 포섭되었다. 장태영을 포함한 의사단 단원들이 북한군의 섬멸을 모의하던 중 단원 한 사람이 배신을 하면서 의사단의 존재가 탄로 나며, 의사단 단원 상당수가 북한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대원 중 남상필은 자택에서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의사단 단원은 교사, 대한청년단 단원, 그리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경찰과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과 서부면이던 하남 지역에서는 구국결사대가 활동하였다는 증언도 있는데, 이로 미루어 민간인에 의한 자위 조직이 전국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단 단원들이 북한군에 체포되었을 무렵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북한군은 황급하게 퇴각을 결정하였으며, 포로로 잡은 의사단 단원들에게 밥도 제대로 주지 않다가 광주 쌍령리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퇴각을 하였다. 당시 의사단 단원 28명이 피살당하고 12명이 생존하였다.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은 광주의 쌍령리뿐 아니라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전쟁이 계속 진행 중인데도 불구하고 1950년 11월 추모비를 세웠는데 이름하여 ‘순명의사창의비(殉命義士彰義碑)’였다. 처음에 돌마면사무소 앞에 세워졌다가 도시개발에 따라 몇 차례 이전하였고, 지금은 분당구 이매동에 있는 전철역 이매역 1번 출구 물레방아 옆에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린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남하하게 되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참모총장 콜린스를 설득해 선더볼트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선더볼트 작전은 1951년 1월 25일부터 2월 20일까지 경기도 남부 지역에서 전개된 작전으로, 북한에서는 ‘한강 남안 방어전’이라고 부른다. 선더볼트 작전 당시 성남 지역에서는 불곡산에서 전투가 치러졌으며, 이후 이곳에서는 국군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되었다. 수리산, 모락산, 태화산, 무갑산, 용문산, 용인의 김량장, 곤지암 등지가 주요 전투지였다.
[결과]
6·25전쟁 중 성남 지역에서 북한군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의사단의 활동은 미수에 그쳤고, 단원들 중 28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당시 주민들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추모비[순명의사창의비]를 세우며, 호국 보훈의 성남시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한이 다시 위기에 처했을 때 선더볼트 작전의 성공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한계점이 노출되었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내며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남한과 유엔군의 인명 손실은 77만 6000여 명이나 되었고, 공산군의 피해는 200만 명에 달하였다. 특히 민간인 피해는 남한 약 100만 명, 북한 약 150만 명이었으며, 피난민 320만 명, 전쟁 미망인 약 30만 명, 전쟁고아 약 10만 명이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상호 신뢰보다는 적대시하게 됐으며, 이념 갈등만 깊어지게 되었고, 평화통일의 꿈은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전쟁 당시 성남 지역에서 조직된 의사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규군 외에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북한군과 싸우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회 저변에는 전통적 의병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