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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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致仁先生墓 |
영어공식명칭 | Tomb of Kim Chi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 길마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현 |
조성 시기/일시 | 1790년 - 김치인 묘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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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716년 - 김치인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790년 - 김치인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3월 3일 - 김치인 선생 묘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 지정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 길마재 |
성격 | 묘소 |
양식 | 원형 합장 |
관련 인물 | 김치인 |
소유자 | 청풍 김씨 종중 |
관리자 | 청풍 김씨 종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김치인의 무덤.
[개설]
김치인(金致仁)[1715~1790]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어머니는 심징(沈澄)의 딸이다. 1748년(영조 24) 춘당대(春塘臺)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1755년(영조 31)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757년(영조 33) 이조참판에 특배(特拜)되었다. 당시 영조를 친견하고 아버지 김재로에게 전하는 어찰(御札)을 받는 등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62년(영조 38) 공조판서·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65년(영조 41)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1767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1772년(영조 48)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남해현에 유배되었으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다시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용되어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해 『명의록(明義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1786년 (정조 10)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 『대전통편(大典通編)』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위치]
김치인 선생 묘는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 길마재의 나지막한 언덕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가에 둘러싸여 묘역 환경이 나쁘다. 조산(祖山)으로 멀리 소래산이 보인다.
[형태]
첫 번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두 번째 부인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합장묘이고, 세 번째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 묘는 합장묘 앞에 배치된 특이한 형태이다. 완산 이씨는 오른쪽, 달성 서씨는 왼쪽, 광주 이씨는 앞쪽에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주위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봉분 왼쪽에 묘갈(墓碣)이 있다. 중앙에 상석과 높이 56㎝의 향로석, 좌우에 높이 1.74m의 망주석과 높이 63㎝의 석양(石羊)을 배치하였다. 석물은 기교를 부리지 않은 형태로 기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금석문]
봉분 좌측에 1790년(정조 14) 세워진 묘표(墓表)가 있다.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은 높이 1.61m, 폭 68㎝, 두께 37㎝이다. 묘표의 비문은 이조판서 조돈(趙暾)이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전면 글씨는 형 김치일(金致一)의 아들인 부정자(副正字) 김종순(金鍾純)이 썼다. 신도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해 갔다고 전해진다.
[현황]
2017년 현재 김치인 선생 묘는 민가에 둘러싸여 있으며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치인 선생 묘는 18세기 말 정조 시대의 묘제와 석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