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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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輿地圖書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승호 |
[정의]
1760년대 경기도 시흥 지역의 실상을 기록한 지리지.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1765년(영조 41)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엮은 전국 지리지이다. 조선 후기 각 지방의 지리적 특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저자]
조선 후기 전국의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묶어서 편차(編次)한 것으로 별도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편찬/간행 경위]
17세기 중엽 이후 사회 질서가 정비되면서 중앙 정부에서는 각 지방 사회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중앙에서는 각 군현 단위에서 개별적으로 작성한 읍지를 토대로 지리지 편찬을 계획하였으나 복잡한 정치 상황으로 미루었다가 18세기 중엽 영조 재위(在位) 초기에 실현하였다.
『여지도서』 편찬 경위는 『영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57년 8월 9일 홍문관의 수찬(修撰) 홍양한(洪良漢)이 간행된 지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이 변화된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므로 각 도의 읍지를 올려보낼 것을 청하면서 『여지도서』 편찬 사업이 시작되었다.
[형태/서지]
『여지도서』는 각 군현에서 작성하여 올린 것을 그대로 묶은 것으로, 총 55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1개의 진지(鎭誌)를 포함하여 모두 313개의 읍지가 수록되어 있으며, 각 군현의 채색 지도를 포함한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는 제1책에서 제5책까지에 포함된다.
[구성/내용]
시흥시에 관한 내용은 『여지도서』 「인천」과 「안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는 각 군현에서 올린 것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인천과 안산에 포함된 항목은 다소 차이가 있다. 주요 항목에는 강역(疆域), 방리(坊里), 도로(道路),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風俗),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역원(驛院), 봉수(烽燧), 누정(樓亭), 사찰(寺刹), 고적(古蹟), 인물(人物),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 등이 있다.
방리조(坊里條)에서는 면 단위 하위 행정구역의 명칭과 관아에서의 거리, 면별 호적의 호구 수를 기록하였으며 인구수는 남녀로 구분해 놓았다. 지금의 시흥시에 속하는 면은 신현면·전반면·황등천면·마유면·초산면·대월면·잉화면[인화면] 등이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은 마유면이었다. 호구 수는 마유면 488호, 신현면 459호, 황등천면 371호, 초산면 342호, 전반면 303호, 잉화면 274호, 대월면 239호 등이었다. 산천조(山川條)에는 시흥시의 진산(鎭山)인 소래산을 비롯하여 군자산·정왕산·사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721년(경종 1) 진휼청에서 인천과 안산의 경계에 쌓았던 제방인 석장둔(石場屯)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인문지리지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여지도서』는 이후 여러 지리지를 편찬하는 데 중요한 지침서 역할을 하였다. 방리·제언·도로·전세·군병 등의 항목이 더해져 조선 후기 각 군현의 사회적·경제적 내용이 크게 보강되었다. 또한 각 읍지의 시작부에 거리와 방위 등이 비교적 정확한 대축척 지도를 첨부하여 18세기 중엽 지방 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각 군현의 호구·전세·대동·균세·봉름 등 재정과 관련된 항목이 부각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