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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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重林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일원에 있었던 조선시대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거나 공적인 일에 마필을 공급하던 곳.
[개설]
중림역(重林驛)은 조선시대 중림역도(重林驛道)에 딸린 7개소 속역(屬驛) 중 하나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역원(驛院) 제도는 고려시대의 것을 이어 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태종~세종 연간에 걸쳐 전국적인 규모의 역로망을 구축하였다. 경기도에는 대로(大路) 12역, 중로(中路) 9역, 소로(小路) 32역으로 총 52개의 역이 있었다. 이 가운데 중림도(重林道)는 양천~시흥~안산, 양천~부평, 양천~통진, 양천~시흥~인천을 잇는 역로로 7개의 역이 있었다. 인천의 중림역과 경신역(慶新驛), 안산의 석곡역(石谷驛), 금천의 반유역(盤乳驛), 양천의 남산역(南山驛), 부평의 금수역(金輸驛), 통진의 종생역(種生驛) 등이 속해 있었다. 이들 역은 모두 소로에 속하였다.
당시 인천부에 속해 있었던 중림역은 인천부 중에서는 가장 큰 역이었으며 중림도의 중심역 역할을 하여 역승(驛丞) 이후에는 찰방(察訪)이 소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인천부에서 서쪽으로 33리[약 13㎞]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중림역이 위치하고 있던 중림리는 마을 서쪽 지역인 ‘안말’, 동쪽 지역인 ‘아랫말’, 중앙인 ‘가운뎃말’로 나누어 부르고 있었는데, 중림역은 안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시흥시 과림동 일원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는 중소 규모의 공장이 난립해 있어 옛 모습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중림역이 속한 중림역도에 대한 소개가 전해지고 있으며 각 역마다 역승이 1명씩 배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대마(大馬), 기마(騎馬), 복마(卜馬) 등 역의 운영에 필요한 역마의 종류와 필(匹) 수 외에 노비 등의 인원수까지 적혀 있어 미약하나마 역의 운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변천]
역의 철폐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전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서(徐) 모라는 이가 경기감사로 있을 때 중림역사를 헐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후 역사(驛舍)를 시흥 발소(撥所)[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로 옮겼는데, 그 이후부터 마을이 한촌(閑村)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발소는 발막(撥幕)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읍내에 원(員)이 계심으로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고 말을 타고 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