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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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797年八月正祖行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7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지금의 시흥을 경유해 화성 현륭원으로 간 행행.
[개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추존(追尊)을 위해 노력하였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을 만들고 화성(華城)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1년간 총 13번의 원행(園幸)을 하였는데, 이 중 10차 원행인 1797년(정조 21) 8월 행행(行幸)은 유일하게 지금의 시흥 지역을 지난 것으로 행행 별시(別試)와 구환(舊還)[갚을 때가 지난 환곡]을 면제하는 등 지역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준 것은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죄를 풀기 위해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양주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 13) 수원 용복면 화산(花山)으로 이장해 ‘현부의 은혜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뜻으로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수원 관아는 팔달산 기슭으로 옮겨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행궁을 마련하였다.
정조는 즉위부터 죽는 날까지 행행을 하였다. 재위 24년간 태조의 건원릉 등 66회나 되는 능행(陵幸)을 하였는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능행차를 단순한 행차가 아니라 국왕의 행차가 방문지 백성들에게 행복[혜택]을 주는 일, 곧 행행이라 했고 백성들은 정조 행행을 관광(觀光)이라 불렀다. 1797년(정조 21) 8월 행행에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참배하고자 한 것은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한 것을 본보기로 ‘갑자년 구상’에 따라 왕세자[순조]가 15세가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아 수원으로 옮겨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현륭원을 지키며 왕권을 보위하고자 한 것이다.
[경과]
1797년(정조 21) 정조의 행행이 두 차례 있었다. 1796년(정조 20) 9월 화성이 완공되자 낙성연 겸 장릉을 경유한 행행을 추진하지만 대신들의 만류로 이듬해 1월 29일 화성 축성에 대한 순행(巡幸)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8월 15일 10차 원행으로 시흥 지역을 경유하는 긴 능행차가 이루어졌다. 8월 4일 병조(兵曹)에서 장릉 및 현륭원 행행 군령(軍令)을 보고하면서 본격적인 준비가 되었다. 보통 하루면 가는 길을 김포로 우회하여 인천과 안산을 지나 현륭원으로 갔기 때문에 과천으로 가는 원래의 필로(蹕路)[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던 길]와 1795년(정조 19)에 개척한 '수원 별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다.
15일 창덕궁 선원전 다례 - 김포 장릉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함.
16일 부평행궁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옴. 정조 「풍기렵렵해문회」 지음. - 민회빈(愍懷嬪) 묘 헌작례 - 하연(河演), 김재로(金在魯), 김치인(金致仁), 구종직(丘從直) 치제(致祭) - 밤이 되어 안산행궁 도착, 안산군수 왕도상에게 고을의 고충을 듣고, 다음날 넓은 곳에 백성들을 모아 대령하라고 명함
17일 정안옹주(貞安翁主), 정정옹주(貞正翁主), 김류(金瑬), 한준겸(韓浚謙), 장유(張維), 장선징(張善澂) 치제 - 안산 군문(郡門) 밖 5리 지점에 주필(駐蹕)하며, 길가의 안산 부로(父老)를 불러 고충을 물음[백성들이 근년에 풍년이라 즐거운데 구환 때문에 근심이라 아룀] - 현륭원에서 작헌례 - 저녁에 수원행궁[화성] 도착
18일 과천·시흥·김포·부평·인천·안산·광주·남양·수원 등 모두 10개 고을 구환 탕감 및 유생은 제술(製述), 장교와 군졸은 활쏘기 시험 하교(下敎)
19일 수원 별로로 환궁하여 84건의 상언(上言)을 처리
이때 예정에 없었으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 민회빈 강씨 묘인 영회원(永懷園)를 찾았다. 당시 시흥 지역을 경유한 경로를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평행궁 출발- 한양과 인천을 오가는 길 합류[수인로를 이용하여 인천대공원 인근 도착] - 상아산 김재로 묘를 지나[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시흥시 경계 지점] - 소래산 앞길 도착[하연 선생 묘가 있는 시흥시 신천동 계란마을 앞길] - 중림역(重林驛)에서 목감천을 넘어[신천사거리에서 범안로까지 이동] - 영회원를 들리고[광명시 노온사동 소재] - 중림도(重林道)로 나와[광명시와 시흥시 경계 지점] - 무지내 감조개를 넘어 한양과 인천을 오가는 길 합류[금이사거리] - 조남동 장군재 앞을 지나[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장선징 묘가 있는 시흥시와 안산시 경계 지점] - 안산행궁 도착
위와 같은 추정 경로는 실록에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행행로를 선정할 때 당시 역참(驛站)을 기준으로 이루어졌고, 16일 정조가 “부평참(富平站)이 안산까지 명색은 40리[약 16㎞]이나 실은 거의 배나 되었다.”라고 하여 80리로 추정하여 환산하면 대략 31.5㎞가 되는데, 이 추정 경로의 실제 거리를 따져보면 대략 33㎞이므로 정조의 말과 부합된다.
[결과]
1797년 8월 정조 행차는 시흥 지역에 큰 혜택을 주었다. 정조는 행행에서 84건의 상언을 받아 처리하였다. 상언과 격쟁(擊錚) 말고도 연로에 지나는 각 고을의 백성들과 수령들을 불러 친히 고충을 물어 듣고 민원을 해결하였다. 특히 화성행궁에 도착하여 지나온 10개 고을의 구환을 탕감하고 행행 별시를 통해 지역 유생들이 가문의 명예와 입신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안산은 부(賦), 시(詩), 명(銘)의 제술에 74명이 응시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 3명, 서책(書冊) 하사(下賜) 22명으로 입격률이 33%였다. 부는 김집(金鏶)[안산군 동몽교관(童蒙敎官)], 명은 최홍진(崔鴻晉)[최성대의 종손이자 류경종(柳慶種)의 사위], 시에 권중술(權中述)[권만형의 10대손)이 입격하였다. 특히 어제(御製)로 내린 제는 안산군민을 만나서 풍년(豐年)이라 들은 이야기로 지었고, 시제가 “남경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홍종을 가져와 심어 이르기를 연성이라 하였다(奉使南京 取錢塘紅種之號曰 蓮城).”는 강희맹(姜希孟)의 연지고사로 지어 관곡지가 국가적인 공인이 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1797년 8월 정조 행차는 시흥 지역에 각종 미담과 설화로 만들어져 구전되고 있다. ‘8월 17일 안산 관아에서 정조가 친림 과거를 했다는 이야기’, ‘하중동 은휴정에 정조가 행차한 이야기’, ‘정조가 행행 비용 충당을 위해 호조벌을 막았다는 이야기’ 등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정조 행행을 기념하고 자부심이 되었던 당대 지역민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이다. 정조가 공인한 관곡지는 1846년(헌종 12) 안산군수 권용정(權用正)에 의해 연지기를 두어 관리하게 되었고, 여기서 유래된 안산의 별호 연성(蓮城)은 지역 내 주요 성씨들의 연합 족보인 『연성성보(蓮城姓譜)』의 편찬과 1920년대 연성음사(蓮城吟社)라는 시회 결성 등 지역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역 사족들은 정조의 권농 정책에 호응하여 권농사(勸農社)를 만들어 구한말까지 지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1797년 8월 정조 행차로 시흥 지역이 애민 군주(愛民君主) 정조와 아주 친숙하게 맞닿아 당대 민본적 정치 사상의 혜택을 받은 사실과 한편으로는 조선 왕조 중흥의 주역이라는 정신적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정조의 사상과 정신을 받들어 지역의 미풍양속을 일구어왔다는 사실은 시흥 지역 정신 문화사에 있어서 소중한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