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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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法蓮寺址 |
영어공식명칭 | Beoblyeon Temple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방문식 |
건립 시기/일시 | 1650년 - 법련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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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조남동 산1-5] |
성격 | 절터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법련사의 터.
[개설]
법련사지(法蓮寺址)는 옛 절터로서 시흥시 조남동에 있다. 법련사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아버지 장유(張維)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최근의 지표 조사에 따르면 절터 지점에 유물과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원래 절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변천]
법련사는 1650년(효종 17)에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장유는 예조와 이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로 불렸던 인물이다. 법련사지로 추정되는 시흥시 조남동에는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장유의 부친 장운익(張雲翼)의 신도비가 있어 법련사가 장씨 문중의 묘역을 수호하는 일종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위치]
1988년 경기도에서 발간한 『기내사원지(畿內寺院址)』에는 “법당 자리로 생각되는 편평한 곳에는 장씨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2000년 기전문화재연구원[지금의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수행한 지표 조사에서도 절터는 수암봉[398m] 자락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장운익 신도비 등이 있는 곳 주변인 시흥시 조남동 산1-5으로 보고하고 있다.
한편 현재의 법련사는 시흥시 수인로2236번길 83[조남동 4]에 있다. 본래 위치는 장군재마을 응단말에 있던 기상연구소에서 동쪽으로 300m쯤의 절골[寺谷]에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절골에는 깨어진 기와 조각과 주춧돌 등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절골을 원래 법련사가 있었던 사지(寺址)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법련사지와 관련된 조사는 『한국의 사지』와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사지』에 따르면 법련사지는 창건에서 폐사까지를 기록한 문헌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유 신도비문에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신도비는 마모가 심해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시흥시가 시흥 지역의 광역 지표 조사를 진행하고 발간한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사지로 추정되는 지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발굴 결과가 기재되어 있다.
법련사지로 추측되는 곳에서는 건물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유물은 빗살문이 찍힌 회흑색의 조질(粗質) 기와 조각과 대접, 바리때[발(鉢)] 등의 백자 조각이 지표면에서 쉽게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수습된 백자 조각은 모래를 받친 채 그릇을 포개 번조(燔造)[불에 구워서 만드는 일]한 조선 후기 이후의 거친 백자 계열이 대부분이다.
[현황]
법련사지는 2000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시행한 지표 조사 이래로 정밀 조사 발굴이 진행되지는 않은 상황이다. 2017년 현재 법련사 터에는 주춧돌과 축대가 약간 남아 있다. 사찰의 연혁이나 기록이 전해지지는 않으나 절터로 추정되는 곳 주변으로 장운익 신도비,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가 남아 있어 이 사찰의 창건 유래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