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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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 |
이칭/별칭 | 동학 농민 운동,갑오 농민 항쟁,1894년 농민 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894년 전라북도 순창군을 포함하여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개설]
동학(東學)이란 서학(西學)에 맞서는 종교로 1860년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하였다. 동학 농민 혁명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으로, 사관에 따라 동학란, 동학 농민 운동, 갑오 농민 항쟁 등으로 불리다가 2004년 「동학 농민 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으로 동학 농민 혁명이라 칭하게 되었다. 동학 농민 혁명은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는데, 이때 순창 지역에서도 접주 우동원(禹棟源)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1893년 전후 순창 지역에는 이미 동학이 전래되었는데, 이는 천도교 교단에서 발행한 『천도교회 월보(天道敎會月報)』와 『전북 순창군 천도교 교안(全北淳昌郡天道敎敎案)』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전북 순창군 천도교 교안』을 통해 우동원, 지동섭(池東燮), 방진교(房鎭敎)가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순창의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가입한 이유는 『우동 암행 문집(禹東菴行文集)』에 의하면 동학이야말로 국가의 정책을 시정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구심점으로서 신분 제도 철폐, 빈부 차별 일소, 탐관오리 소청 등 구체적인 방안을 통해 포덕천하(布德天下)[천도를 널리 펼쳐 이상 사회를 만듦], 광제창생(廣濟蒼生)[널리 백성들을 구제함],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보호하여 국민을 안전하게 함]의 큰 뜻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과]
동학 농민 혁명의 진행 과정은 대체로 1893년 준비 단계, 1894년 1~2월의 고부 봉기 단계, 3~4월의 1차 봉기 단계, 5~6월의 전주 화의(全州和議)와 7~8월의 집강소 설치 단계, 9월 이후의 2차 봉기 단계로 나뉜다.
1893년 준비 단계란 1893년 3월 동학 교단의 최시형(崔時亨)·서병학(徐丙鶴) 등의 주도에 의해 최제우의 신원을 위한 보은 집회가 열리고 있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에서 손화중(孫華仲)·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열린 독자적 집회를 말한다. 이 금구 집회에서 전라도 지방의 동학교도들이 주로 집결하였고 이미 이때 순창도 동학교도들이 분포하여 있었기에 상당 부분 참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1894년 1월의 고부 봉기 단계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단순한 교조 신원 운동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 정치적 변혁 운동을 구성하는 단계에 돌입하였다. 1894년 3~4월의 1차 봉기 단계에서는 가히 그 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3월 21일 전후로 무장에 집결한 주력 부대는 무장·영광·고창·흥덕·정읍·고부·태인·부안·금구·김제 등 인근 연해 지방의 동학도들이었으며, 그 밖에 호남 남부 지방에서도 상당수 동학도들이 참여했다. 1차 봉기의 가장 큰 성과는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와 황룡촌 전투(黃龍村戰鬪) 등으로, 여기서 농민군이 승리하면서 기세를 잡게 되었다.
이 시기 순창 접주가 된 우동원은 담양 접주 남응삼(南應三)과 함께 활동하다가 고부 농민 봉기 소식을 듣고 백산 봉기에 참여하였다. 이때 우동원의 장남 우종삼(禹宗三)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우동원을 비롯한 각지 접주들이 황토현 전투에 참여할 시점에 순창의 농민들은 보은으로 떠나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당수 순창 농민들이 보은으로 떠났기 때문에, 당시 순창 군수 이성열(李聖烈)은 순창 군아를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농상민(農常民)을 끌어올 정도였다.
농민군의 지휘 체계는 전봉준을 정점으로 그 아래에 각 지역의 접주가 그를 보좌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로 각 지역의 농민군은 그 지역 출신 접주의 통제력 아래에 있었기에 농민군은 연합군적인 성격을 띠었고 일관적인 지휘 체계를 받기 어려웠다. 1894년 7월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 사이에 집강소(執綱所) 설치가 공식 합의되었다.
이 시기 동학 조직은 급격히 팽창되었는데 동학 농민 혁명의 세 지도자인 김개남(金開男)·손화중·전봉준은 각자 지역별로 순회 지역을 설정하였다. 김개남은 장수와 임실 일대를 순회하였고 손화중은 장성과 광주, 마지막으로 전봉준은 최경선(崔景善)을 수행원으로 하여 금구·김제·태인을 거쳐 장성·담양·순창·옥과·남원·창평·순천·운봉 지역을 순회하였다. 곧 일본군이 밀려옴에 따라 동학 농민 혁명은 9월 2차 봉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1월 동학 농민군은 패색이 짙어졌고 결국 우금치 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하면서 동학 농민 혁명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결과]
동학군은 2차 봉기 당시 일본군과 벌인 우금치 전투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잔여 농민군 토벌에 열을 올렸는데, 순창 지역에서는 대동산 아래 숲정이 사정(射程)[현 순창읍 사정리 재래시장 부근]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접주 우동원 역시 7년이나 광양·순천·곡성·남원 등을 돌아다니다가 순창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돌아왔을 당시 상당수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또한 동학 농민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봉준이 재기를 노리다가 김경천(金敬天)의 고변으로 체포된 곳도 순창 피노리이다. 이때 1994년 박환성[68]의 증언에 의하면 전봉준이 잡혀가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관군이 주막을 에워싸니까 월동용으로 쌓아놓은 장작더미 꼭대기에 올라 버텼답니다. 관군은 장작에다 불을 질렀고 펄쩍 뛰어 담을 타넘는데 일본도에 회목[아킬레스건]을 맞아 주저앉았고요. 그날 밤새 하도 모질게 두들겨 패, 하루면 갈 길을 이틀 걸려 순창군청으로 끌고 갔다고 들었어요.”
2005년 5월 30일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에 전봉준이 일본군에 체포된 역사적인 장소가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순창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학이라는 사상적 가치를 기반으로 사회 변혁을 꿈꾸기 위해 수많은 농민들이 투쟁한 지역이다. 또한 동학 농민 혁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봉준이 재기를 노리며 몸을 숨긴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창 지역의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