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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53
한자 林炳瓚
이칭/별칭 시중(時中),중옥(中玉),돈헌(遯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 2월 5일연표보기 - 임병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9년 - 임병찬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9년 7월 - 임병찬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6년 6월 - 임병찬 순창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중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임병찬 대한 독립 의군부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임병찬 대한 독립 의군부 총 대표로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16년 5월 23일연표보기 - 임병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임병찬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임병찬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 마을
활동지 임병찬 창의 유적지 -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276-1
성격 의병장
성별
본관 평택(平澤)
대표 경력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시중(時中)·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증조할아버지는 임경손(林慶孫), 할아버지는 임민규(林玟圭), 아버지는 임용래(林溶來)이며, 어머니는 송악 왕씨이다. 조준극(趙俊極)의 딸인 임천 조씨와 15세에 결혼했으나 부인이 일찍 죽어 16세 되던 해에 송상희(宋祥喜)의 딸인 여산 송씨와 재혼하였다. 아들 임응철(林應喆)이 있으며, 손자 이름은 임진(林鎭)이다.

[활동 사항]

1. 벼슬살이

임병찬(林炳瓚)[1851~1916]은 1851년(철종 2) 2월 5일 옥구현 서면 대사리(大寺里)[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앞산 남산(南山) 기슭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인 1867년(고종 4) 옥구현의 형방(刑房)으로 들어갔다. 1886년(고종 23) 전라도의 대동리(大同吏)가 되어 거문도 설진 공사 감독관으로 공을 세워 1889년(고종 26)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제수받았다. 그해 7월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 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 이때 1884년(고종 21) 이래로 체납된 세금 6만 7000냥과 쌀 1,800여 석을 모두 추징하는 업적을 쌓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 임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임병찬은, 1893년(고종 30) 순창군 접경의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송리(種松里)로 이사를 와서 흥학재(興學齋)라는 학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끄는 김개남(金開南)이 자신의 고향인 태인 땅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송두용(宋斗鏞)을 시켜서 전라도 위무사 이도재(李道宰)에게 넘겼다. 그 공으로 무남영 좌령관(武南營 左領官)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고, 다시 임실 군수(任實 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2. 의병 활동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어려서 잃은 어머니 시묘 살이를 하겠다며 어머니 무덤을 그가 살던 종석산(鍾石山) 위로 옮기고는 여막에서 지냈다. 이 어머니 묘는 2013년 6월 정읍시 산내면 종석산[능교리 산 355]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즈음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편지를 통해 교류하였고 함께 창의에 대해 논의하였다. 1905년 6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무성 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태인을 정복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였다.

빠른 속도로 정읍과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근방 포수들이 모여 들어 진영은 900명에 이르렀다. 6월 12일 순창으로 진격하였으나 몰려든 적군이 일본군이 아니고 전주와 남원 진위대 군사임을 확인하고 동족끼리 살상할 수 없다 하여 해산하였다. 일본 군인에게 구속되어 최익현은 대마도 감금 3년을 받았고 임병찬은 대마도 감금 2년형을 받았는데, 최익현이 순절한 후에도 임병찬은 감금 생활을 계속하다가 1907년 1월 순종의 재빙가례(再聘嘉禮)로 인한 은전(恩典)으로 석방되었다.

3. 독립 의군부 결성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여 단연 동맹 회의소(斷煙同盟會議所)를 조직하고 전북 단연 기도회(全北斷煙期圖會)의 찬성장(贊成長)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구속되어 탄압을 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이 맺어진 후 11월 12일 순창군 헌병 소장이 찾아와 일왕의 은사금과 첩지를 전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1912년 음력 9월 28일 충청도 공주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 황제(光武皇帝)[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1913년 1월 10일에는 전참판 이인순(李寅順)이 또 밀칙을 받들고 찾아 왔다. 마침내 1914년 전국적인 독립 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 전쟁을 준비하였다. 임병찬, 민정식(閔正植), 이명상(李明翔) 등 13명을 총 대표로 하여 각 도 대표 14명, 각 군 대표 302명을 합쳐 총 329명에 이르렀다. 독립 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대규모 의병 전쟁이었다. 그러나 1914년 5월 3일 김창식(金昌植)이 왜경에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겨 조직의 비밀을 자백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말았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총독 및 일본 내각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대리로 경무 총감(警務總監)을 보냈는데 임병찬은 경무 총감 타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에게 국권 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이 끝난 후 6월 3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임병찬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평소 지니고 다니던 칼로 목을 찔렀으나 일본 경찰의 긴급 구호로 목숨을 구하였다. 6월 12일 1년 감금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되어 14일의 단식을 행하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천명을 기다리길 원하며 식사를 시작하였다. 1915년 6월 3일 거문도 일본인 주재소 소장이 찾아와 1년 감금이 더해져 2년간 거문도에 있으라 하였다는 총독부 훈령을 전하였고, 1916년 5월 20일 병이 나 그로부터 3일 뒤인 23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돈헌 유고(遯軒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회문산 최고봉인 지붕산 바로 아래 있으나 현재 군산으로 이전을 논의 중이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전북 의병사』(전북 향토 문화 연구회, 1990)
  •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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