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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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歸來亭-金振宗-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손앵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96년 - 김진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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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57년 - 김진종 사망 |
배경 지역 | 귀래정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진종(金振宗)[1496~1557]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김진종이 순창에 있는 귀래정을 읊은 한시.
[개설]
「귀래정(歸來亭)」[김진종]은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신재(新齋) 김진종(金振宗)[1496~1557]이 순창에서 귀양 생활을 하면서 귀래정[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67호]에 올라 읊은 한시이다. 김진종은 성균관 전적으로 재임할 때인 1545년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547년에 순창으로 귀양 갔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선조(宣祖) 때 신원되었으며, 학행이 빼어나고 충절이 높다고 평가받았다.
귀래정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신말주(申末舟)가 낙향하여 1495년(연산군 1)에 지은 정자이다. 현재 있는 귀래정 건물은 1974년에 재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종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를 비롯해 강희맹(姜希孟), 김인후(金麟厚) 등의 시문이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최근 귀래정 측면에 강희맹의 한시 「귀래정」과 김인후의 한시 「영귀래정(詠歸來亭)」의 원문 및 한글 번역본을 판각한 비석과 서거정의 「귀래정기」 한문 원문과 번역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구성]
귀래정에 걸린 김진종의 「귀래정」은 그가 을사사화 때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1547년(명종 2)에 순창으로 귀양 왔을 때 지은 한시로 보인다. 모두 2수이며, 각각 오언 배율과 칠언 절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내용]
蹉我未曾去(차아미증거)[아! 일찍이 고향에 갈 수 없는 몸]
登臨愛此亭(등임애차정)[여기 와서 이 정자 사랑하게 되었네]
形骸宇宙內(형해우주내)[몸은 우주 안에 있어도]
怊悵古今情(초창고금정)[예나 지금이나 슬픈 세월]
嘯詠園林晩(소영원림만)[시를 읊다 보면 날이 저무는데]
溪山風月淸(계산풍월청)[강산풍월은 맑기도 하여라]
故園千里外(고원천리외)[머나먼 고향 생각]
今日眼猶明(금일안유명)[오늘도 잠 못 이루네]
亭上歸來客(정상귀래객)[나그네 정자에 오르니]
園林自昔時(원림자석시)[수풀은 옛날과 같아라]
淸和佳節會(청화가절회)[청화하고 좋은 시절 만나서]
歌詠暮雲遲(가영모운지)[노래하고 시 읊으니 해 지는 줄 몰라라]
竹逕人初散(죽경인초산)[대밭 길에서 사람들과 헤어지고]
荊扉我不知(형비아부지)[가시나무 사립은 내 알 바 아니다]
狂吟醒醉裏(광음성취리)[깬 듯 취한 듯 미친 듯이 읊조리는 가운데]
言志有爲詩(언지유위시)[뜻을 말하면 시가 된다네]
溪山千載得人奇(계산천재득인기)[이 고장 천년 만에 사람 얻어 신기한데]
栗里南山共名馳(율리남산공명치)[율리와 남산 이름 같이 달리네]
貪戀客顔何局促(탐연객안하국촉)[가엾은 그 얼굴 어이 그리 수척한가]
歸來意味自徐遲(귀래의미자서지)[돌아온 의미를 스스로 알리라]
[의의와 평가]
김진종은 유학(幼學) 시절부터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여 별과시(別科試)에 천거된 인물이다. 관직에 있을 때에도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 주었으나, 을사사화 때 간신 이기(李芑)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순창 배소(配所)에서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두 편의 한시는 고향을 떠나 10여 년의 세월을 순창에서 쓸쓸히 지내는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고향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안타까운 심회를 미친 듯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김진종의 문집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귀래정 편액에 남아 있는 한시 두 수는 더욱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