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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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摠傳說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Kim Chong(Folktale) |
영어음역 | The Legend of Kim Chong(Folktale)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Kim Chong(Folkta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해숙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618년 - 「김총전설」 『승평지』 김총 관련 기사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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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김총전설」 『강남악부』 김총 관련 기사 수록 |
관련 지명 | 성황신김총영정|김총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
채록지 | 「김총전설」 - 전라남도 순천시 |
성격 | 인물담|신이담 |
주요 등장 인물 | 김총|견훤 |
모티프 유형 | 국가[후백제] 건국|영웅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견훤을 도와 후백제를 건국한 김총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김총(金摠)에 관련 기록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승평지(昇平誌)』, 『강남악부(江南樂府)』 등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승평지』에서는 김총이 상주 가은현에서 여수 등 서남해 방위의 공을 세워 비장이 되어 무진주 등을 정벌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강남악부』에는 『승평지』를 인용한 내용이 간략히 실려 있다.
[내용]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김총은 대보공 알지(閼智)[김알지]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생몰 연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김총은 여수 지역 성황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순천김씨의 시조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서 김총은 견훤(甄萱)에게 벼슬하여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고 죽어서는 순천부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승평지』에는 평양군 김총이 상주 가은현(加恩縣)에서 태어나 여수 등 서남해 방위의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고서 무진주 등을 정벌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섬겨 관직이 인가별감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남악부』에는 『승평지』를 인용하여 후백제의 김총은 견훤을 섬겨 관직이 인가별감에 이르렀고, 죽어서는 고을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모티프 분석]
「김총전설」은 김총이 후백제의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인가별감이란 벼슬을 했으며, 죽은 후에는 순천의 성황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특별한 인물이 죽은 후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건국신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인데, 단군신화에서 단군이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김총 역시 성황신으로 좌정(坐定)[자리 잡아 앉음]하였다는 점에서 신화적인 면모가 확인된다.
실제 김총을 성황신으로 좌정시키고 거기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황사 또는 성황당은 고려 초기 국가 통치기구의 하나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성황사가 있었겠지만, 국가 제도의 성격을 지닌 성황사가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부터였다. 그런데 김총을 성황신으로 모신 김총사는 이것과 다른 성격의 것이다. 김총사는 중앙정부가 주도해서 세운 것이라기보다는 순천의 지방세력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즉 성황사는 중앙정부에 의해 설치되기도 했으나 지방토호들에 의해 자의적인 성황사가 출현한 것은 고려 중기 이후 일이었다. 김총사도 이런 성격의 성황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기사처럼 곡성의 신숭겸(申崇謙)이 현의 성황신으로 모셔지거나 의성의 김홍술(金洪術)이 성황사에 모셔지고 있는 예들이 비슷한 경우에 속하는 것들이다.
한편, 김총은 순천김씨의 시조로 모셔지는 인물이다. 김총이 견훤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김총이 순천 지역에서 일정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지방토호였음을 말해준다. 『강남악부』에는 김총의 후손 김승주가 현 순천인 평양부원군을 지내고, 김순고(金舜皐)가 중추부사에 이어 평양군을 물려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순천김씨 세력이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렇게 김총 이후 지방호족으로 성장한 순천김씨가 자신들의 집단적인 세력에 힘입어 시조인 김총을 성황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 김총사였다고 생각된다. 시조에 대한 숭배가 지역의 성황신으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남악부』의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1784년 무렵까지는 진례산에 있는 김총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에 성황신김총영정[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27호]을 모신 영당과 묘소가 자리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