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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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이칭/별칭 | 일제 시대,사옥 시대,식민지 시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일제 강점기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
조선 총독부는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고, 총독은 일본 일왕에 직속되어 총리 대신을 거쳐 일왕에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민족 말살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제국주의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또 조선 통치의 최고 방침은 내선일체화, 곧 궁극적으로 조선을 시코쿠·규슈화하는 철저한 동화주의 정책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의성]
일제 강점기의 의성군은 18개 면, 182개 동의 행정 구역과 2만 1358호에 인구 13만 4680명의 지역이었다. 의성 군수는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면장은 대부분 조선인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의성군의 지배를 위해 의성 경찰서를 설치하였는데, 1906년 10월 경무 고문 안동 분견소 의성 분파소가 설치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이 개설되면서 의성 경찰서로 승격하는 것과 동시에 80여 명의 치안 병력이 16개 주재소를 관할하게 하였다.
의성군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 중심이었으며, 대표적 작물은 미곡·맥·대두 등이었다. 그중 의성군은 면작에 있어서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중요 생산지로 부각되었다. 의성군의 금융 기관으로서는 의성 금융 조합을 비롯한 4개 금융 조합이 있었다. 산업체로서는 1928년 의성 주조 주식회사와 1929년 의성 국자 조합이 있었다.
교육 기관으로는 1930년대 중반 무렵 공립 소학교 2개 교와 공립 보통 학교 10개 교 등이 있었고 학생 수는 2,900명 정도였다. 그 밖에 주요 관공서로는 의성군청, 대구 지방 법원 의성 출장소, 안계 우편소, 면사무소 18개 등이 있었는데, 주요 공직자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차지했다.
[일제 강점기 의성의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의성에서는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10년대 국권 회복 운동과 3·1 운동 그리고 파리 장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농민·청년·형평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1930년대 초에는 적색 독서회, 적색 농민 조합 운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의성 지역의 독립 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적극 동참하면서도, 의성 지역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