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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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出産儀禮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은정 |
성격 | 평생 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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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시기/일시 | 출산 전후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아이의 출생을 전후하여 행하는 의례.
[개설]
출산 의례 는 한 집의 구성원들이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祈子) 행위로부터 생일에 이르는 의례를 통해 한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단계에서 행하는 의례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문을 계승하는 첫 시작은 남자 아이를 출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집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부정한 것이 침범하지 못하게 금줄을 치고 삼신께 생명을 점지해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것도 가문을 잇게 해주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생일은 가족 성원으로서 그리고 백일과 돌잔치 때 가족과 친척, 이웃이라는 같은 공동체 성원들의 관계를 정립하는 통합의례의 성격을 띠게 된다. 출산 의례(出産 儀禮)는 넓은 의미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행하는 기자 의례부터 금기, 태교, 해산, 태처리 등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의례가 포함된다.
[연원 및 변천]
전통 사회에서는 출산 장소가 대부분 가정이었으며, 현대 의학이 발달되기 전이라 모든 책임을 가정과 마을에서 도맡아야만 했다. 따라서 전통 시대에는 출산 의례가 가진 사회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의학 기술이 도입된 이후부터 출산 의례와 관련한 구체적인 실천 행위는 변화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통 사회에서 기자의 방법이란 성심을 다해 여러 속신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원하는 시기에 임신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아이의 출산 장소는 대부분 병원으로 변화되었고, 산후 조리 또한 가정에서의 산후 구완 보다는 산후 조리원이라는 공간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출산과 산후 조리의 장소가 변화됨에 따라 부모와 조부모의 역할도 또 다른 요구를 받고 있다. 다만, 다른 평생 의례에 비해서 출산 의례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후기 근대 사회의 핵가족 시대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모의 만삭 사진 촬영, 백일, 돌잔치와 같은 행사는 상업 자본의 힘을 얻어 전통 사회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퍼포먼스로 지속되는 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차]
1. 기자(祈子)
의성군에서는 경상북도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기대가 컸다. 심지어 아이가 생기지 않는 여성의 경우에는 남편이 새장가를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는 주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보통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절에 가서 부처님께 아들을 기원하는데, 스님으로부터 받은 부적을 휴대하거나 베개에 넣어 두기도 했다. 간혹, 이웃 중에 아들을 낳은 이의 속옷을 시어머니가 얻어다가 며느리에게 입히기도 했다.
2. 산전(産前)
1) 태몽(胎夢)
의성 지역 주민들에 의하면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은 아들이고, 닭이나 새가 나오는 꿈은 딸이라고 하며, 특히 달과 해가 나오는 경우에는 이름난 아이를 얻는다는 구전이 있다.
2) 태아의 성별 및 출산일 예지법
첫 아이는 친정에 가서 낳는 경우가 많은데 월경이 언제쯤 끊겼는지를 헤아려 해산달을 맞추어 친정에 간다고 한다.
3) 유산법
자꾸 아이가 들어서게 되면 유산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도토리로 약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산에서 채취한 도토리를 방앗간에서 빻아 떡을 찌는 시루 밑에 넣고 작대기를 걸친 후 짚을 둘러 놓고 동네 우물을 가져다 퍼부으면 밑으로 빨간 물이 떨어지는데 이것을 받아 먹으면 독한 기운으로 인해 유산된다고 믿었다.
3. 해산(解産)
1) 해산 준비
산통으로 배가 아파 아이를 낳는 것을 ‘튼다’, ‘임신 중에 튼다’고 말한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의 이승순[여, 83세, 2010]에 따르면, 이승순은 혼자서 아이를 낳았는데, 문고리를 붙잡고 매달려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 때만해도 혼자서 출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산모의 출산일이 다가오면 출산 때 힘을 줄 수 있게 명태와 깨를 참기름에 볶아서 국을 끓여먹기도 한다.
2) 산실
산모가 자는 방에서 출산하게 되는데 과거에는 짚을 짜서 만든 것을 깔아 놓은 것이 보통이었고 형편이 나은 집은 왕골을 깔아 놓았다고 한다. 이승순의 집에는 왕골자리가 깔려 있는데 아이가 틀어 나올 것 같으면 그 자리를 둘둘 말아 재껴 놓고 흙 위에 짚을 말끔하게 깔아놓았다고 한다. 이는 출산 때 출혈이 생기기 때문으로 이때 사용한 짚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린다고 한다.
3) 태(胎)의 처리
산모에 따라서 출산 후 태가 나오는 시기는 다르다고 한다. 이승순은 출산 후 20분 만에 태가 나왔는데, 그때 실을 가지고 아이의 배꼽이 있는 쪽으로 손바닥 길이가 모자랄 정도를 남겨두고 잡아맨다. 그리고 다른 쪽은 태에서 피가 나오기 때문에 묶어 두고 끊어버린다. 의성군에서는 딸을 낳으면 가위로 탯줄을 끊고 아들을 낳으면 낫으로 끊었다고 한다. 태를 처리할 때 어떤 사람은 밭고랑에서 셋을 헤아리고 태를 버리면 그 아이가 세 살 되었을 때 동생이 생긴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태를 부엌 아궁이에 넣어 태우기도 하였다.
4) 금줄
출산하게 되면 그 집에서는 ‘금색’이라고 부르는 금줄을 쳐서 출산을 알리고 부정한 이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금줄은 왼새끼로 꼬는데, 집의 대문에 작대기를 세운다. 아들을 낳으면 고추 세 개와 숯 세 개를 꽂아 놓고 딸을 낳으면 솔잎을 꺾어서 꽂아 놓는다. 이승순은 삼칠일 동안 걸어두었다고 한다.
4. 산후(産後)
1) 산실 출입
출산하게 되면 할아버지는 칠일 째가 되어야 아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어른들은 아기를 보려면 ‘칠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와서 “새 사람 보자.” 하며 들어와서 아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2) 삼신상[産神床]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리는데 삼신 단지 아래에 차린다. 예전에는 쌀이 귀했기 때문에 산모에게 먹일 쌀을 한 말 따로 두었다가 그것을 떠서 밥을 하고, 깨를 찧어 미역국을 끓여서 상을 차린다. 그 후에 “삼신 할매요, 군자방성 낳은 것 곱게 잘 크게 해주이소. 잘 먹고 잘 크도록 해 주이소.”라고 하며 삼신에게 아이의 건강을 기원한다. 그 후에 밥과 국을 산모에게 주어서 먹게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이승순은 지금껏 삼신을 방 안에 모시고 있는데, 그 신체는 방 귀퉁이에 단지를 한지로 덮어 놓은 것이었다. 이것은 이승순이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아랫대에 물려줄 생각은 없지만 자신은 계속 모실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