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00 |
---|---|
한자 | 竹邊里竹邊城址 |
영어의미역 | Jukbyeon Fortress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산3-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토성 터 |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신라시대 |
지정면적 | 약 30,060㎡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산3-1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에 있는 신라시대 토축 성지.
[변천]
죽변리 죽변성지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 국경인 소공령(召公嶺)과 해상에서 오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토축으로 성을 조성하고 수군 2,000명을 주둔시켰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죽변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관측하고 방어하기 위한 최적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내륙에서 바다로 힘껏 돌출한 곶(串)으로 성 안은 아담하고 평탄하여 군사 주둔지로 이용하기가 용이하다.
죽변곶 봉우리 일대에 자생하는 소죽(小竹)은 화살대의 재료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이를 보호하고 왜적이 연안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라시대부터 보루성(堡壘城)을 구축하였다. 죽변 시내 평지의 시가지는 대부분 바다를 메운 지대다. 이곳에는 약 500여 년부터 민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5대 이상 세거해온 씨족이 없어 성지에 대한 자세한 내력을 알 길이 없다.
[위치]
죽변성지는 죽변등대가 있는 구릉의 정상 주변 산죽이 덮여 있는 사면 일대에 위치한다. 동쪽은 정치봉(鼎峙峯)이 동주하여 내륙에서 바다로 돌출한 죽변곶을 이루며, 남쪽은 자연 항구와 방파제가 좌우에 있다. 장산성에서는 동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다.
[현황]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죽변곶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일대에는 자연적으로 솟아 올라온 구릉성 지형을 이용한 성지의 잔흔이 남아 있으나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다. 특히, 구릉 전체에 대밭이 형성되어 있어 길을 찾기도 어려워 토성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성의 흔적은 남서쪽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에 의해 끊기고, 다시 서쪽으로 민가의 담을 넘어 북진하고 있다. 성의 형태는 각 부분의 모를 둥글게 한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 안으로는 매우 평탄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북동쪽으로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고 성 안쪽으로 토단을 높게 쌓아올렸다. 서쪽의 민가 부분에는 석축의 일부도 확인할 수 있으나, 죽변성과 관련된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추정되는 성의 둘레는 78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30,060㎡이다.
현재의 죽변등대 동쪽은 바다를 끼고 있는 자연 절벽의 상태다. 절벽의 안쪽으로 회곽도(廻郭道)가 마련되어 있고, 토성의 잔흔을 거의 확인할 수 없으나 일부는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은 평탄하나 현재는 산죽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고 일련의 구조물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의 제보와 지형을 참조하여 성의 추정선을 살펴보면 해발 25m의 등고를 쫓아 자연 지형대로 돌아가고 있다. 남쪽으로는 일부 민가가 있으나 바닷가 절벽선상을 그대로 토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죽변성지가 있는 마을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죽변성에 관한 기록은 고 지리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울진군지』 울진읍 성곽 죽변성조에서 볼 수 있다. 그 기록으로 보아 죽변성지는 죽변면 후정리 장평 일대에 축성하여 운영된 장산성의 수군 주둔지로 활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행정성의 의미보다는 장산성의 수군 주둔지인 군사적인 전초기지로서 기능한 것으로 판단되며, 봉수의 중계지로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죽변곶 일대는 죽변성에 관한 자료보다는 봉수지와 관련된 자료가 사료에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해 평해군에서 전반인산-죽진산-죽변곶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봉수 루트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