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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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澄圭 |
영어음역 | Yi Jinggy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양산. 조부는 이조판서 이만영(李萬英)이고 아버지는 순찰사 이전생(李全生)이다. 이전생이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살았고 큰형 이징석(李澄石)이 세조 대에 추충좌익공신숭록대부예조판서중추부사(推忠佐翼功臣崇祿大夫禮曺判書中樞府事)로 양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양산으로 하였다. 둘째 형은 세종 대에 함길도절제사를 역임한 이징옥(李澄玉)이다.
[활동사항]
이징규는 맏형인 이징석과 이징옥의 틈바구니 속에서 장군으로서 생애를 마치지 못했다. 이징규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로, 6살 때 산에 있던 큰 돌을 메고 내려와 문전에 내려놓았는데, 지금도 그 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금정산 금봉탕 앞에서 글공부를 하고 금정산 산상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 18세 때 무과에 장원급제 한 후 감찰을 거쳐 세조 때 내금위장·중추원사·진응사·진하사·병조판서·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징규가 무예를 닦았다는 금정산 고당제 근처에는 아직도 마애여래불좌상이 남아 있는데 이를 두고 일명 이징규의 자화상이라는 말도 있다.
1461년(세조 7) 9월 『세조실록』에 의하면 “이징규가 명나라에 진하사로 가서 중추절과 성절을 화려하게 빛내어 국위를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453년(단종 1) 8월 24일 이징규가 온정으로 가는데 세조가 동교에 나가서 이징규를 전송하였고, 동년 12월 16일 이징규를 원종공신일등으로 녹훈했다.
1453년 10월에서 1454년 2월 사이에는 큰 형 이징석과 함께 이징옥의 친형제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연금당하였으며, 조정의 세조 측근 중신들이 무려 13회 이상이나 이징규를 연좌 주살하라고 상소한 바 있다. 세조의 반대로 구명되었으며, 세조는 오히려 이징규를 중추원사, 판중추원사, 진응사, 진화사 등으로 품계를 높였다.
그러나 죽은 뒤 말년에 거주하던 자택은 초토화되어 연못이 되고 무덤은 폐허가 되었으며, 직계 후손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현재는 무덤 앞에 머리가 잘린 장군석이 있다. 세조의 중신들이 세조 말년인 1467년에 세조 사후에 있을 수 있는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여 지방민들의 난동극을 꾸며 만들어낸 결과라고 한다.
국도 35호선이 통과하는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에 있는 도마교(倒馬橋)[현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녹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이징규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징규가 하사받은 천리마가 얼마나 빠른가를 시험하고자 자기 집 문전에서 활을 쏘고 동시에 말을 달렸는데 말이 도마교에 와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빙빙 돌면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에 화살이 먼저 와서 떨어지고 말이 뒤따라 온 것으로 착각한 이징규는 격분하여 말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 직후에 화살이 날아와 땅에 꽂혔다. 비로소 말이 화살보다 빨랐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뉘우치면서 이징규는 말을 그 자리에 안장하고 도마비를 세워 말의 영혼에게 사죄하고 앞으로는 결단코 경솔한 결단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그 후로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한다.
[묘소]
무덤은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숙종 대에 영산군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