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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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이영문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
[개설]
일반적으로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 시대라 하며, 문자의 발명과 그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역사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사이에 대해 원사 시대(原史時代)[protohistor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문자 기록이 없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주변 지역에 남아 있는 시기로, 우리나라의 경우 원삼국 시대 또는 삼한 시대가 이에 속한다. 선사 시대의 기록은 고고학에서 발굴을 통해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서 재구성된다. 고고학에서는 인류의 발달을 생활 도구의 주된 재료에 의해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진정한 선사 시대는 석기 시대라 할 수 있다. 석기 시대는 다시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와 간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로 나뉜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를 선사 시대에 포함하는 경우도 많으며, 대부분의 시기가 국가 성립 이전 단계에 해당된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는 인류 문화의 원초 단계로 약 25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구석기 시대의 문화는 뗀석기로 대표된다. 이 뗀석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지 활동과 자유로이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는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한 개의 석기를 가지고 여러 용도로 쓴 주먹도끼나 찍개 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중기나 후기로 가면서 몸돌에서 떼어낸 돌날을 잔손질한 긁개, 자르개, 찌르개 등 크기가 작으면서 한 개의 도구가 하나의 쓰임새로 사용되도록 석기가 만들어졌다.
영암 지역에서 뗀석기가 발견된 곳은 13곳이지만 대부분 시종면 금지리 송내 등 시종면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아직 발굴 조사된 곳이 없지만 거의 대부분 구릉에서 뗀석기들이 수습되어 나주 당가나 촌곡처럼 영산강 주변의 구릉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된 석기는 석영제 몸돌, 찍개, 외날찍개, 여러 면 석기, 돌날격지, 찌르개, 끝날긁개, 격지 등 후기 구석기에 속한 것들이 많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그 특징은 토기의 사용과 농경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신석기 시대는 농경과 목축 등 식량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 사회이다.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 대신 더 정교한 날을 세운 간석기가 사용되고 처음으로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토기의 제작과 사용은 정착 생활의 증거이며, 곡물의 저장과 조리 등 구석기 시대에 비해 새로운 문화를 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의 예로 볼 때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청동기 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1,500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약 2천 년부터는 농경의 흔적이 발견된다. 즉 탄화된 곡물과 함께 돌삽과 돌괭이 등 농경 도구, 대형 저장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영암 지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시대에 속한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된 바 없지만 광주 노대동이나 함평 당하산 등지처럼 하천변 평지나 구릉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덴마크의 톰센(C. J. Thomsen)이 제안한 석기, 청동기, 철기 등 3 시대 체계 중의 하나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 개념이다. 청동기 시대는 구리에 주석 등을 합금한 주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즉, 인류가 처음으로 청동 주조 기술을 알게 되어 청동기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인류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되며, 그 이전의 석기 시대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시대이다. 문명이 발달된 지역에서는 이미 국가가 형성된 역사 시대에 해당되며, 정치의 중앙 집권이 이루어져 중심 마을이 형성되는 시기여서 도시 혁명 시대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발굴 성과로 인해 기원전 1,500년까지 올라가고 있으며, 하한은 기원전 300년 전후까지로 보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바뀌어 가고, 간석기가 더욱 발달하여 각 석기마다 쓰임새에 따라 일정한 형태가 갖추어져서 일상생활 도구로 활용되는 한편, 논과 밭농사 등 농경이 본격화되고, 무덤이 정형화되고 집단으로 조성되어 핏줄[血緣] 가계가 형성되며, 청동기가 제작 사용되는 시기라는 점이다.
영암 지역에서는 선사 시대 중 가장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유물 또한 다양한 종류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집터로는 영암 장천리 선사 주거지[전라남도 기념물 제98호]와 학산면 금계리에서 각각 10여 기 이상이 발굴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과 타원형이며 중앙부에 타원형 구덩이가 있고 그 양단에 중심 기둥 구멍이 있는 형태이다. 이런 형태가 충청남도를 비롯한 서남부 지역에서 많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 외의 지역과는 다른 하나의 문화적인 배경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무덤으로는 고인돌이 대표적이며, 발굴 조사된 것만 10여 곳에 이른다. 대표적인 고인돌로 서호면 장천리 괴음 고인돌 떼와 영암 엄길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제82호], 학계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제229호], 삼호읍 망산리 망산 고인돌 떼와 서호리 소서호 고인돌 떼가 있다. 이곳에서는 10기~수십 기의 무덤이 집단으로 조성되어 있어 당시 유력한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영암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물은 간돌검과 간화살촉 등 무기류와, 돌칼[石刀], 간돌도끼 등 다양한 생활 용구류, 좁은 놋단검[세형동검]과 옥, 검정 간토기 등 부장 유물이 있다.
[의의와 평가]
영암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구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많이 발견되었다. 유적과 유물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에 영산강 주변의 구릉 지대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청동기 시대는 고인돌과 청동기로 대표된다. 고인돌은 밀집 분포상을 보이고, 탁자식 등 여러 형태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7m에 이르는 대형 고인돌이 많으며, 비교적 위세품의 성격을 가진 청동기와 옥, 간돌검 등이 부장 유물로 발견되었다. 청동기는 후기에 속한 것들로 고인돌 축조 집단에 이어진 세력 집단이 서해안과 영산강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