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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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이칭/별칭 | 한국 전쟁,6·25 사변,한국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기훈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전라남도 영암군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한국전쟁, 6·25 사변, 한국동란 등으로도 불리는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까지 남한과 국제 연합군이 북한과 중화 인민 지원군에 맞섰던 전쟁이다. 한반도 내부에서 좌익과 우익, 남한과 북한이 대결하는 내전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전세가 바뀔 때마다 미국 등 국제 연합군과 중국의 인민 지원군이 연이어 참전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3년 1개월여의 긴 전쟁 기간에 직접적인 전투로 말미암아 발생한 피해도 극심하였거니와, 전선이 거의 국토 전체를 왕복하듯 이동하고 그때마다 지역을 점령한 측도 거듭하여 바뀌면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휴전 후에도 강력한 국가 권력과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영암 지역에도 전쟁의 상처가 크게 남았다.
[역사적 배경]
해방 직후 영암은 조극환(曺克煥)[1887~1966] 등 인민 위원회 세력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1946년 2월 미군정이 이들을 축출한 이후에야 우익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좌익은 1946년 10월 미군정의 무리한 미곡 정책 때문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추수 봉기’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1947년 미곡 창고·시종 지서·영암 경찰서 등을 공격했다. 1948년 이후 영암 주변의 산지에 빨치산들이 모여들면서 군경에 의한 토벌이 자주 벌어졌다.
[경과]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 경찰서는 군내 보도 연맹원들을 예비 검속하여 공회당에 가두어 두었는데, 인민군이 다가오자 1950년 7월 15일과 22일, 두 번에 걸쳐 수십 명의 보도 연맹원을 사살하고 후퇴하였다. 1950년 7월말 영암에 인민군이 진주하자 군, 면에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과 28일의 서울 수복 이후 영암 인민 위원회 세력은 일부 월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월출산과 금정면 등을 통하여 입산하여 빨치산 부대를 구성하게 된다. 퇴각하던 좌익 중 일부는 현준호 등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으며 1950년 10~11월에도 빨치산들이 지서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등 민간인에 대한 피해가 계속되었다.
1950년 10월 6일 영암읍에 경찰이 진주하면서 수복되었지만, 구림 등 일부 지역은 여전히 빨치산과 인민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1950년 10월 17일 영암 경찰서 토벌 부대는 구림 마을에 진입하여 곳곳에 사격을 가했는데 실제 좌익 세력은 모두 마을을 떠난 후여서 무고한 민간인이 70명 이상 희생되었다. 구림 외에도 빨치산 토벌이 계속되던 1951년 3월까지 영암읍·삼호읍·군서면·금정면 등에서 수십 명에서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되었으며, 이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까지 포함된 가족 단위의 희생도 많았다.
[결과]
전쟁 중에 상호간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과 보복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으며,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회적 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이 대거 살해당하면서 지역 사회의 자율적 힘이나 공동체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반면에 국가의 지배력은 강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은 크나큰 상처지만, 이런 현대사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뚜렷하다. 군서면 구림 마을이 대표적인데,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의 자전적 역사를 서술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공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진실을 밝히고 좌와 우, 가해와 피해를 넘어 화해를 이루려는 이들의 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모범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