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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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滿妻崔氏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성운 |
[정의]
고려 후기 영암 출신의 열녀.
[개설]
정만(鄭滿)의 처 최씨(崔氏)[?~1379]는 1379년(고려 신우 5)에 왜구들이 진주에 침입하였을 때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왜구로부터 절개를 지킨 열부이다.
[가계]
도염서승(都染署丞) 최인우(崔仁祐)의 딸이며 진주 호장(晉州戶長)을 지낸 정만의 처이다. 자녀 4남매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만 처 최씨 는 영암에서 남편이 있는 진주로 시집을 갔다. 1379년 8월에 왜구들이 진주에 침입하였을 때 남편 정만과 네 자녀 중 최만(崔滿)은 개성에 가 있었기 때문에, 최씨는 자녀 셋을 데리고 산중으로 피하였다. 이때 최씨의 나이 30대로 용모가 아름다워서 왜놈들이 칼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최씨는 “죽일 놈아! 몸을 더럽히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절개를 지키고 죽겠다!”라고 하면서 저항하였다. 이에 분노한 왜구가 최씨를 살해하고 두 아들을 납치하였다. 홀로 남은 여섯 살 아들 최습(崔習)은 그때까지 젖을 떼지 못하였는데, 시체가 된 최씨의 곁으로 가서 젖을 빠니 솟아나는 피가 입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10년 후 도 관찰사 장하(張夏)가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여 정려문을 세워 최씨를 표창하였고, 최씨의 남은 아들 최만에게 아전의 의무를 면제할 것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