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98 |
---|---|
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전라남도 영암군의 인물.
[개설]
영암 지역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식민 통치가 이루어진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지정받은 인물가운데 영암과 관련된 인물은 총 63명이며, 이 가운데 39명이 영암 출신일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의병 활동, 3·1 운동 참가, 학생 운동, 국내 항일 운동, 광복군 활동, 미주 지역 항일 활동, 군자금 모금을 통한 독립운동 지원, 언론 활동을 통한 항일 의식 고취 등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요활동]
영암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4월 10일 영암읍 장날을 기하여 발생하였는데, 주도 인물은 조극환(曺克煥), 김재홍(金在洪), 박규상(朴奎相), 박흔홍(朴炘弘), 정학순(鄭鶴順), 조병식(曺秉植), 조희도(曺喜道), 최기준(崔琪焌), 최성심(崔聖心), 정상조(鄭相祚), 김영언(金永彦) 등이었다. 영암 출신 인물 가운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김준연(金俊淵)의 경우는 『동아 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언론을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문사훈(文士勳)·문성선(文性善)·박수봉(朴壽奉)·박유성(朴裕成)·최규창(崔圭昌)·최규철(崔圭哲)·김판권(金判權)·최판옥(崔判玉)·최동환(崔東煥)·최석호(崔碩鎬)·조문환(曺文煥)·이창희(李昌熙)·신원범(愼元範) 등은 일제 강점기 불합리한 소작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며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주도하거나, 사회단체 활동과 애국 계몽 운동 등을 통해 국내 항일 운동에 동참하였다.
박인배(朴仁培)·이상철(李相哲)·이춘수(李春洙) 등은 1929년 발생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적극 가담하거나, 학생 비밀 결사 또는 야학 활동 등을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1930년대 들어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항일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영암 지역에서는 영보 형제봉 사건이 발생하였다. 영보리·장암리·영암읍 등 각 지역에서 100여 명의 인원이 모여 “일본인들은 논과 밭을 조선인에게 되돌려주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들만 7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 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영암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이들이 순국하거나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그러한 국가에 대한 희생과 노력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애국장, 애족장, 건국 포장, 대통령 표창 등을 수여받거나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