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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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디딜방애,똥방애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헌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했던 농기구.
[개설]
디딜방아 는 디디는 방아다리가 하나인 외다리방아와 둘인 양다리방아가 있다. 방아채의 앞머리 부분에는 공이가 달려 있어서 돌로 만든 확 속의 곡식을 찧거나 껍질을 벗기는 구실을 한다. 즉 방아다리를 디뎠다 얼른 놓는 서슬에 내려쳐진 공이의 힘으로 곡식을 찧거나 왕겨를 벗기는 것이다. 또 공이 끝에는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른 촉을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쇠나 돌로 부처님 머리처럼 오돌토돌하게 만든 촉은 왕겨를 벗기는 데 쓰고, 돌로 된 밋밋한 촉은 빻는데 쓰며, 촉이 없는 나무공이는 쓿는 데 사용한다.
이처럼 디딜방아는 곡식을 찧는 것 이외에 떡을 찧거나, 고추를 빻기도 하며, 메주콩을 이기는 등 요긴한 것이어서 부엌이나 그 가까이에 설치했다. 특히 양념을 찧는데 주로 쓰였던 조작방아의 경우에는 다리가 없는 방아채를 발로 밟으면서 방아채 앞머리 부분에 묶어놓은 줄을 손으로 당기면 공이가 들리는 특이한 형태의 방아로 크기가 비교적 작다. 디딜방아의 확이 매설되어 있는 부분의 바닥은 삼화토(三華土)로 다지거나, 매흙질이 되어 있어서 반들거리고 깨끗하다. 또 방아다리를 딛는 부분에는 딛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여 발 디딜 디딤돌과 가로 손잡이를 설치하여 발을 딛는 이가 균형을 잃지 않게 했다. 이 외에도 천장 들보에 끈을 묶어내려 잡도록 했다.
디딜방아 는 지방에 따라 딸각방아, 발방아, 돈방아라 했고 외다리방아의 경우는 디염[욤]방아라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방아 또는 방하라 했으며, 한문으로는 대(碓), 망대(䃃碓)라고 썼다. 영암군 삼호읍 서호리에서는 디딜방애 또는 똥방애라 불렀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용하였다고 한다. 방아질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방아다리를 디디는 이와 확 속의 곡식을 뒤섞는 즉 께끼는 이의 박자와 호흡이 잘 맞아야만 한다. 외다리방아로는 한 사람이 하루에 벼 다섯 말[90.195ℓ]에서 여덟 말[144.312ℓ]을 찧을 수 있고, 양다리방아로는 세 사람이 하루에 2~3가마의 매조미쌀을 쓿을 수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디딜방아 는 절구와 같은 기능을 하지만 발로 방아다리를 디디어 방아채를 움직여 충격력을 키워서 더 능률적으로 움직이게 발전된 방아다. 우리나라에서 디딜방아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고구려의 안악 고분 제3호분의 벽화[357년]에는 디딜방앗간의 장면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디딜방아의 형상을 살필 수 있다. 당시에 그려진 디딜방아는 외다리방아로 오늘날의 외다리방아와 비슷하다.
고려 시대의 건물터로 밝혀진 경상북도 문경시 상초리의 전 조령원지(傳鳥嶺院址)에서도 부엌의 한쪽 벽 밖에 설치되었던 디딜방아의 흔적이 발굴된 적이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양다리방아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동농서(海東 農書)』에서 “외다리방아[單梃碓]는 중국에서 쓴다.”라고 한 점이나 『임원경제지』에서 디딜방아를 동구(東臼)라고 표기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헛간 옆에 설치되어 있는 디딜방아를 간혹 볼 수 있는데, 추운 북쪽 지방이나 도서 지방에서는 넓은 부엌의 한 귀퉁이에 따로 벽을 쳐서 구획하고 디딜방아를 설치하였다.
[형태]
영암 지역의 디딜방아는 약 3m 길이의 긴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방아의 몸체나 공이는 참나무·느티나무·대추나무·밤나무 등 목질이 단단한 나무로 만든다. 사람이 발로 디디는 방아다리와 곡식을 찧는 앞의 공이 부분 그리고 이 두 곳을 연결시켜주는 방아채 등으로 구분된다. 외다리방아는 방아채가 짧고 가늘며 양다리방아는 이에 비해 좀 더 길고 방아다리 또한 제비꼬리처럼 Y자로 갈라져 있다. 방아다리와 공이 사이의 방아채 중간쯤에는 위가 U자 모양으로 홈이 파여진 직사각형의 지렛대 구실을 하는 볼씨[받침대]를 양쪽에 세워 그 사이에 방아채를 가로질러 쌀개[굴대]를 끼워 올려놓았다. 방아채 앞머리 부분에는 구멍을 뚫어 밑으로 공이를 박아 놓았으며 공이 아래에는 확이 매설되어 있는데 곳에 따라서는 키가 낮은 돌절구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디딜방아 는 예로부터 농가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농경 생활 도구 중 하나였다. 그래서 민간 신앙적인 면도 많다. 예컨대 방아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도 나무를 고르고 벨 날을 잡는다. 그리고 다 만들고 나서도 이를 앉히는 날을 잡아 방아가 탈 없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방아 상량문을 써서 방아를 걸었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떡시루에 정화수 놓고 여주인이 정성을 다해 고사를 지낸다. 만약 고사를 지내지 않거나 지내더라도 성의가 부족하면 방아 동티가 생겨 식구 중 한 사람이 원인모를 병에 걸리게 된다. 이때 역시 날을 받아 무당이 방아머리를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면서 동토 잡이 축원을 외운다. 또한 첫 방아는 남을 주지 않고 반드시 주인집 방아를 찧으며, 방아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도 미리 날을 받아 고사를 올린다. 이렇게 해야 방아 동티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곳에 따라서는 이웃마을에 장티푸스나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이 돌 때 디딜방아로 액막이를 하였다. 예컨대 밤에 다른 마을에 몰래 가서 방아를 훔쳐와 마을 입구의 고개나 서낭당이 있는 자리에 거꾸로 세우고 방아다리에는 여자의 속옷 등을 걸어 둔다. 그러면 행인들이 이것을 보고 전염병이 도는 마을의 출입을 하지 않아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 민간에는 한 집에 임신부가 둘 있고 이들이 같은 해에 해산을 하게 되면 불길하다는 속신이 있었다. 따라서 한 부인이 안채에서 아이를 낳으면 다른 부인은 부득이 방앗간을 산실(産室)로 삼아 일단 아이를 낳아 탯줄을 자른 뒤에라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 방아질은 방아품이라고도 하는데 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방아품팔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방아품앗이이다. 앞의 것은 노동력의 대가로 품삯을 받는 일이고 뒤의 것은 순서에 따라 돌아가면서 상대방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처럼 방아질 일은 몇 집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저녁이나 비 오는 날 모아서 마을 이웃 공동단위로 방아를 찧는 경우가 많았다. 이밖에도 방아는 성(性)과 관련지어 여러 가지 속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것은 방아공이가 돌확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꼴이 마치 성행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