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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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糸津里 |
영어공식명칭 | Sajin-ri |
이칭/별칭 | 실진,실나리,시나리,신너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사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근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사진리는 영덕군 영해면의 가장 동쪽 남부에 자리한 해안 마을이며, 행정리는 사진1리·사진2리·사진3리로 분리되어 있다.
[명칭 유래]
사진리(糸津里) 동명의 유래는 나루가 실(悉)과 같이 길게 뻗어 있다고 하여 '실나리'로 불리다가 이후 '시나리' 또는 '사진'이라 하였다. 사진리의 북쪽에 자리한 사진1리는 1620년(광해군 12)경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뛰어난 사람이 태어나라는 의미에서 걸리동(傑里洞) 또는 건리진(件里津)이라 불렀다고 하며, 19세기 전기에는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하여 마을 북쪽 도로변에 평평한 밭이 많다고 하여 '밭내미'라 불렀다고 한다. 사진리 중앙에 자리한 사진2리는 나리[나루]가 실[糸]과 같이 길게 뻗어 있다고 하여 실진, 실나리·시나리·신너리 또는 사진(糸津)이라 하였다. 1690년(숙종 16)경 평택임씨(平澤林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뒤 수안김씨(邃安金氏),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사진리 남쪽에 자리한 사진3리는 망월리(望月里)라 하였는데, 지명이 변하여 마흘진(磨屹津) 또는 마흘발·마을발이 되었다. 봉화산(烽火山) 아래에 있어 공수진·대진·건달리·밭내미·시나리와 함께 6진(津) 중의 하나로, 1600년(선조 33)경 고려(高麗) 유신(遺臣)의 후예인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마을을 개척하고 이어 흥해배씨(興海裵氏)가, 1650년(효종 원년)경 평택임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형성 및 변천]
사진리는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읍내면(邑內面)에 속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영해군 읍내면 지역이 되었다. 그 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건리진(件里津)·마흘진(磨屹津)·건달동 일부와 남면(南面)의 축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진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하였다. 1949년 8월에 지방자치제가 공포되고 동회(洞會)제도가 실시되어 사진1구·사진2구·사진3구라 하였으며, 1961년에 사진1동·사진2동·사진3동이 되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사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환경]
사진리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죽한 형태를 보이며 북쪽 황성개비산[158.6m]에서부터 남쪽으로 망월봉[225.5m]·대소산[278.2m]·봉화산[285.9m] 등으로 이어지며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높이가 높아지고, 동해로 급경사지가 이루어져 넓은 평야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안을 따라 갈매기암·전남암(前南岩)·매미바우·벼락바우·진주암·돔바우 등 크고 작은 바위로 된 암석 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사진리의 2020년 말 면적은 2.56㎢이며, 2021년 5월 기준 총 172가구[사진1리 48가구, 사진2리 71가구, 사진3리 53가구]에 270명[남 118명, 여 152명][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성내리, 남쪽으로는 축산면 축산리와 도곡리가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대진리와 괴시리와 접해 있다. 주요 교통로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영덕대게로가 개설되어 있고, 사진2리에서 북서쪽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장재를 넘어 시무냇골[이십동천(二十洞川)]을 내려가면 영해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펜션 등 숙박업소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