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락의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35
한자 金河洛義陣
영어공식명칭 Kim Harak Righteous Army
이칭/별칭 이천의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5년 11월연표보기 - 김하락의진 결성
해체 시기/일시 1896년 6월 4일연표보기 - 김하락의진 오십천 남천쑤전투에서 패배하여 해체
최초 설립지 경기도 이천시
성격 의병부대
설립자 김하락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부대.

[개설]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은 경기도 이천에서 결성되어 이천의진(利川義陣)이라고도 한다. 김하락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이며, 1846년 경상북도 의성(義城)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설립 목적]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이른바 전기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당시 의병을 일으킨 보수 유림의 구호는 ‘토적복수(討賊復讐)[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을 것]’와 ‘보형보발(保形保髮)[두발과 복장을 가지런히 할 것]’이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내 역적들과 국권을 빼앗으려는 일본 침략 세력을 제거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고 고유문화를 지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변천]

김하락의진은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군 화포군’으로 출발한 의병 부대였다. 그 뒤 1895년 12월 3일 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로 바뀌었다가, 다시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과 연합하였다. 이후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서 1896년 4월 1일 의성, 5월 5일 경주, 5월 22일 영덕에서 각각 연합의진을 구축하였다. 6월 4일 오십천 남천쑤 전투에서 김하락이 순국하면서 해체되었다.

[활동 사항]

1895년 11월 단발령이 실시되자 김하락은 이천으로 내려가 화포군으로 구성된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12월 3일에는 안성(安城)의 민승천(閔承天)을 창의장으로 추대하여, 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고, 1896년 1월 3일에는 남한산성에서 연합의진 남한산성의진을 결성하였다. 2월 3일부터 열흘 동안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2월 21일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김하락은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3월 23일 의성에 도착하였다. 의성에서 김하락의진은 의성의진·청송의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였고, 4월 2일 감은리 전투, 4월 14일 비봉산 전투 등에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5월에는 경주에서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5월 7일 경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5월 12일 관군의 공격으로 곧 물러났다. 김하락의진의 남은 병사들은 5월 22일 영덕에 도착하여, 영덕의진 신운석(申運錫) 등과 함께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김하락이 지휘하는 연합의진은 6월 3~4일 오십천 남천쑤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6월 4일 악천후 속에 관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의병들은 흩어졌다. 이때 큰 부상을 당한 김하락은 “나는 어복(魚腹)에 장사 지낼지언정 어찌 살아서 견양(犬羊) 같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겠는가!”라 말하고, 폭우로 불어난 오십천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이로써 김하락의진의 활동도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하락의진은 경기도 이천에서 결성되었으나, 경상도에서 연합의진으로 활동했다. 당시 영덕 지역을 중심으로 연합의진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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