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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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強占期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Colonial Period |
이칭/별칭 | 일제시대,왜정시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 강점기는 일반적으로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에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동반한 식민지 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을 억압하였다. 이에 민족 독립을 위하여 저항하는 여러 독립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는데, 영덕 지역에서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행정구역 개편]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 행정 기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1913년 12월 29일 공포된 「도의 위치·관할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거하여, 1914년 4월 1일부로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당시 영덕은 영덕군과 영해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부·군·면 통폐합으로 영덕군으로 통폐합하였고, 9개 면 116개 동리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영덕의 읍내면과 동면은 영덕면, 종남면은 강구면, 외남면은 남정면, 서면은 달산면, 북면은 지품면의 5개면으로 통폐합되었고, 영해군의 경우 읍내면과 묘곡면은 영해면, 남면은 축산면, 북초면과 북인면은 병곡면, 서면과 오서면은 창수면이 되었다. 그리고 석보면은 영양군으로 이속되었다.
[경제 침탈]
일제는 강점 이후 정치·행정은 물론 산업·경제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덕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농업 부문의 경우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사업 실시를 바탕으로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1920년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병곡면의 송천들, 영덕면의 남산들, 그리고 달산·지품면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영해면·병곡면 등지에는 무라끼[村木], 미쯔모토[見本], 오가와[小川] 등으로 불리는 일본인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어업 부문의 일제 침탈은 농업보다 빨랐다. 이미 개항기부터 일본인들이 영덕 지역 어장에 출몰하여 각종 이권을 침탈하였다. 강점 직후인 1911년에 어업령, 1912년 조선어업규칙을 발표하여 어업조합을 설립함으로써, 영덕 사람들의 동해안 어장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그 결과 영덕 농·어민들은 토지와 어장을 빼앗기고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을 통하여 식량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목표로 제1차[1920~1925]와 제2차[1926~1934]로 추진되었다. 영덕 지역에서는 1926년 영덕군농회가 조직되어 농사 개량을 추진하였다.
한편, 일제는 금융자본의 수탈을 위하여 금융조합을 설립하였는데, 영덕에는 영덕금융조합과 영해금융조합, 그리고 강구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그 외에도 일본인 자산가에 의해 강구·오보·축산·영해어업조합이 설립되어 일본인이 영덕 지역 어업을 독점하였다.
[독립운동]
1. 1910년대
국권이 피탈되자 1911년 영덕 출신의 박경종(朴慶鍾)·황만영(黃萬英) 등은 그 일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안동을 비롯해 경상북도 일원에서 망명한 인사들과 함께 남만주의 유하현(柳河縣)·통화현(通化縣)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2년에는 박건·박의열·박의훈형제, 이겸호·이형국 등이 그 뒤를 따라 망명하였다. 그 밖에도 아메리카 지역에서 활동한 김진규는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멕시코에서 활동한 박춘삼은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의 회장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에는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덕 지역에서는 3월 18일 영해·병곡·영덕면, 3월 19일 창수·지품면, 4월 4일 남정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의 여파로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하자, 영덕 지역에서도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조직된 대한통의부·서로군정서·의성단 등의 군자금 모집 활동도 영덕에서 일어났다.
2. 1920년대
1920년대에는 청년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신간회운동 등의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1921년 8월 영덕청년회, 1925년 12월 영덕청년연맹 등이 결성되었으며, 그 밖에도 강구청년회·삼사청년회·남정청년회·축산청년회·대부청년회·지품청년회 등이 활동하였다. 1927년 2월에는 민족협동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가 창립되었는데, 영덕에는 1927년 9월에 영덕지회, 곧이어 영해지회가 설립되었다.
3. 1930년대 이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운동이 철저하게 탄압 받았으나, 영덕 출신 인사들은 굴하지 않는 항쟁을 벌였다.
1931년 6월 영덕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y그룹’, 즉 ‘영덕·영양그룹’이 결성되었으나, 1932년 8~9월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와해되었다. 영덕 출신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활동도 전개되었다. 1939년 대구상업학교에서는 태극단이 조직되었는데, 영덕 출신으로는 이준윤이 가담하였다. 이주헌은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하여 조선회복연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해진은 1941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하여 독서회에서 각각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