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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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정의]
1919년 3월 18일부터 4월 4월까지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3.1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3월 8일 경상도 대구를 시작으로 1부 21개 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덕에서는 3월 18일부터 4월 4일까지 영해면·병곡면·축산면·영덕면·창수면·지품면·남정면 등 7개 면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헌병 무단통치를 통한 식민지 직접 지배 체제로 우리 민족을 통제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계승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한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사적 흐름으로 인해 민족 독립운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경과]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병곡·축산·영덕, 3월 19일 영해·창수·지품, 3월 20일과 24일 지품, 4월 4일 남정면에서 각각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선 3월 18일 영해·병곡·축산·창수·지품 등 5개면 20여 개 마을에서 개신교 신자, 유림 가문 인사, 권유받은 주민들이 영해 성내동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3월 18일은 장날이어서 시장을 보러 온 지역민도 많았다. 그날 오후 1시경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남세혁(南世爀)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독립 연설이 이어지고 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자, 영해 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이 나와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어 약 2,000여 명의 군중은 영해 읍내 각처로 분산되어 주재소를 비롯해 면사무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공립소학교·영해편소 등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그런 가운데 군중 중 일부가 병곡에 가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고 주장했다. 오후 2시경 정규하·박의락·서삼진 등 약 200여 명이 병곡으로 향하였으며. 도중에 각 마을에서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오후 4시경 병곡에 도착했을 때 군중들은 400~500여 명에 이르렀다. 정규하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고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로 이동하여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그러자 병곡 경찰에게 통보를 받은 평해(平海)헌병분견소 헌병 3명과 보병 2명이 출동했다. 군경은 군중을 향해 해산을 강요하며 사격 자세를 취하였다. 대치 상황에서 사상자의 발생을 염려해 군중은 해산하였다.
한편, 영해 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의 보고를 받은 영덕경찰서에서는 서장, 경찰 3명, 순사보 1명이 영덕을 출발해 오후 3시 반경에 영해에 도착하였다. 영덕경찰서 경찰들은 영해 경찰관주재소 경찰들과 무장하고 군중을 해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의 공격을 받고 주재소로 피신하였다. 주재소 안에서 위협을 느낀 영덕경찰서 경찰들은 탈주를 감행하였는데, 군중이 돌을 던지며 경찰들을 추적하였다. 영덕경찰서 서장과 경찰 2명은 축산 상원동 등에서 축산 면민들과 영해에서 추적하던 군중에게 포박되어 구타를 당하고 인사불성이 되거나 부상을 입었고 제복·제모가 찢기며 칼·총 등은 탈취당하였다. 군중은 경찰들을 영해로 끌고 와서 일본인 여관에 감금하였다.
영덕 읍내에서는 영덕면 금호동(錦湖洞)의 북장로파 조사(助師)인 강우근이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영덕 읍내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독립 만세 참가를 권유하였다. 한편,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포산동(葡山洞) 신자 이승구(李承玖)도 교직자나 신자들에게 권유하였다. 3월 18일 강우근과 이승구가 영덕 읍내 남석동(南石洞) 시장에서 만나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주도 인사들은 시장 군중 100여 명과 함께 ‘한국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영덕경찰서 경찰들이 출동해 주도 인사 20여 명을 체포하고 해산을 강요해 점차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교회 신자들의 권유를 받은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이 주도하여 지역민과 함께 약 700명이 구금 인사들을 구출하러 경찰서로 향하였다. 하지만 경찰들이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경계 활동을 강화하여 군중은 구금 인사 구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3월 19일에는 영해·창수·지품 등 3개 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9일 아침부터 성내동 일대에서 지역민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인근 마을 주민들도 합세하여 군중은 600~700여 명에 이르렀다. 오전 11시경 경상북도 포항헌병분대에서 분대장 등 7명이 영해에 도착해 영덕경찰서 서장 등 경찰 5명을 구출하고 소총 2정을 회수하였지만, 군중의 위세를 진압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후 4~5시경 대구의 80연대 장교와 병졸 22명이 도착하자, 헌병과 경찰, 보병들이 함께 진압에 나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무력 진압에 만세 군중은 읍내를 떠나게 되었다.
창수면에서는 경상북도 영양군 유지 이종구(李鍾龜)와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권재형(權在衡)·김경발(金景發) 등이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창수동(蒼水洞)으로 집결하였다. 오후 4시경 약 2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몽둥이를 휴대하여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도 인사들의 지휘하에 군중은 주재소와 숙소 건물을 비롯해 시설물·기물·서적·서류·의류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경찰들이 소유물을 민가에 숨긴 사실을 파악하고 찾아내어 파손하였다.
지품면에서는 황장동 교회 집사인 주명우가 원전동 장날에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결심하고 종이 깃발을 만들어 ‘대한독립만만세(大韓獨立萬萬世)’라 적었다. 주민 신자 14~15명에게도 참가를 권유하였다. 3월 19일 정오경 원전동 시장에서 주명우가 종이 깃발을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북장로파 신자들도 호응해 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하였고, 이에 시장 군중들도 함께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20일 지품면 신안동(新安洞)의 윤석초(尹石蕉) 집 앞에서 임순근(林順根)·문의향(文義鄕)·김형문(金亨文) 등 주민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하였다. 저녁이 되자 구 한국기를 본뜬 종이 깃발 1기를 만들고 임순근이 깃발에 ‘대한조선독립만세(大韓朝鮮獨立萬世)’라고 적었다. 마침 윤석초 집 앞에 모인 약 60명의 주민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2시간 동안 마을을 활보하였다.
3월 24일에는 원전동 시장에서 3.1운동이 있었다. 아침에 주명우의 아내 윤악이(尹岳伊)가 김태을의 아내 신분금(申分今)에게 “오늘 여기 시장에서 구한국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윤악이와 신분금은 원전동 시장에 나가 정오 무렵 윤악이가 군중에게 “자신은 여자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한다. 한국만세를 부르자.”라고 소리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신분금도 호응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4일 남정면에서는 20대 청년들의 주도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3일 김도석(金道石) 집에서 박명방(朴明方)·김석조(金石祚)·정상용(鄭尙鎔) 등이 만났다. 청년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구한국 국기를 모방한 깃발을 제작하던 중 김도식의 부친에게 발각되어 모두 소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4월 4일 아침 정상용 집에서 박명방·김석조 등 3명이 다시 깃발 11기를 제작하고 깃발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신대한독립만세(新大韓獨立萬歲)’ 등의 문구를 적었다. 정오 무렵 장사동 시장에서 정상용·박명방·김석조는 박춘길(朴春吉) 등에게 종이 깃발을 배부하고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시장 군중 100명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결과]
영덕 지역의 3.1운동으로 영덕경찰서에 388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39명이 징역 2년에서 태 90대를 선고받았으며, 5명은 대구복심법원 공소, 고등법원 상고를 했다. 영덕지청을 거쳐 경주지청에서 24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대구검사국에서 43명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경주지청에서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된 인사 170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무죄를 받은 인사도 있으며, 최대 징역 7년까지 선고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대구지방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78명이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복심법원에서 일부는 감형되었으나, 대부분 동일 형량을 선고받았다. 3명[권태응·전상호·정재주]은 상고를 제기하여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았다. 모두 20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년 이상의 중형을 받은 인사가 112명으로 53.59%에 이른다. 2명 가운데 1명은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는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8일부터 4월 4일까지 7개 면에서 9회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3월 18일~19일 양일간 6개 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시위 군중이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 공립보통학교, 공립소학교, 우편소 등 식민지 통치 기관을 공격하였다는 점이다. 지품면에서는 남편들이 체포되자 부인들이 독자적으로 3.1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특이한 사례이다. 또한, 2~5개 면민과 다른 지역 인사가 연합하기도 하였으며, 면계(面界)를 넘어 원정 3.1운동을 전개한 점도 주목된다. 주도 세력으로 개신교 교직자와 신자, 지역 세력과 양반 유림, 부녀자와 여성 등 다양하였고 주된 참여자로 농민이 대부분이지만 잡화상, 짚신상, 미곡상 등 상인과 갓제조, 붓제조, 제사 등 제조업자 및 수레꾼, 고인, 용인 등 노동 직종 종사자 등도 활동하였다. 북장로파 세력과 지방 유림세력의 연합으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고, 주민들 참여에 마을 구장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