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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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英陽- |
영어공식명칭 | Yeongdeok Yeongyang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허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덕·영양 지역에 있었던 항일 비밀결사.
[설립 목적]
영덕영양그룹은 조선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고취 및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영덕영양그룹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재건준비위]가 지역의 당 조직 준비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조직되었다. 이기석(李基錫)은 1930년 11월 서울에서 재건준비위에 가입한 후 경상북도 책임자의 임무를 띠고 영덕으로 돌아왔다. 12월 이기석은 유웅경(劉熊慶)과 경상북도 영양의 조훈석(趙薰錫)에게 재건준비위의 결성 목적을 설명한 후 가입시켰다. 이들은 ‘민족적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민중의 지도기관’으로서 ‘y그룹’을 조직하고, 영덕을 포함한 인근 6개 군을 활동 구역으로 결정하였다. 유웅경은 영덕군과 경상북도 영일군을 담당하였으며, 조훈석은 경상북도 영양군과 울진군을 담당하였다. 이기석은 경상도 대구와 인접한 경상북도 영천군과 경주군을 담당하였다. 영덕영양그룹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일환으로 경상북도 책임자인 이기석의 주도로 도 단위의 야체이카[세포]그룹을 조직하고, 산하에 군과 면 단위의 지역 야체이카그룹을 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31년 4월 유웅경은 영덕에서 김상순(金尙順)·김우권(金宇權)·박재술(朴在述) 등과 ‘y그룹’을 조직하고, 영덕·오보·남정·지품·달산의 5개 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유웅경은 영해에서 권병희(權炳熙)·권병종(權炳宗)·권병문(權炳文)과 ‘y그룹’을 조직하였다. 조훈석은 1931년 1월부터 3월까지 경상북도 영양의 남낙진(南洛鎭)·조붕석(趙朋錫)·조재득(趙再得)과 접촉하여 영양군의 ‘y그룹’을 조직하고, 면 단위의 ‘y그룹’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기석은 포항에 거처를 정하고 대구에서 각 정미소의 직공 수, 취업 시간 등을 조사하는 활동을 벌였다.
영덕영양그룹은 영덕에서는 농민계를 조직하여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의 고취와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야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하였으며, 소년회 등의 소모임을 만들어 청소년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영양에서는 1931년 4월 남낙진이 권성달(權成達)·조정암(趙丁岩)·이태을(李太乙)·박병량(朴秉亮)과 야체이카 조직을 결성하였다. 1931년 6월 조붕석은 조종기(趙瑽基)·조보영(趙普泳)·조만영(趙萬泳)과 영양면을 중심으로 독서회와 근로회(勞働會)를 조직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1년 5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기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영덕영양그룹은 1년여 동안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8월부터 영덕에서 30여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1932년 11월까지 영덕에서 농민과 청소년을 포함하여 1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영양에서는 1932년 10월 중순부터 조훈석·조붕석·이태을 등 20여 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유웅경·이태을·조훈석·김상순·조재득·조붕석·남낙진·권병희가 공판에 넘겨졌다.
193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유웅경은 징역 2년 6월, 이태을과 조훈석은 징역 2년, 김상순·조재득·조붕석·남낙진은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권병희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이기석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나 이후 재건준비위의 활동과 관련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1934년 3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영덕영양그룹은 1930년대 전국에서 전개된 혁명적 대중운동의 일환으로서 농민, 청년, 청소년에게 일제 식민지 지배 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