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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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景輔 |
영어공식명칭 | Park Gyeongbo |
이칭/별칭 | 자필,신이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광수 |
[정의]
조선 전기 영덕 출신의 효자.
[개설]
박경보(朴景輔)[1485~1570]는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명종 연간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가계]
박경보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필(子弼), 호는 신이재(莘伊齋)이다. 아버지는 함양 입향조 박종산(朴從山)[박종산(朴鍾山)], 어머니는 단양박씨(丹陽朴氏)이며, 부인은 단양신씨(丹陽申氏)이다.
[활동 사항]
박경보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민물고기를 좋아하셔서 하루라도 드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위독하자 잉어가 좋다고 해서 얼음을 깨고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고래산[경산(鯨山)]을 지나는데 수달 한 마리가 큰 바위 위에 잉어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수달바위'라 불렀다. 또한, 어머니 기침병에 좋다는 석류를 구하였는데, 누군가 훔쳐가 버렸다. 다음 날 영해부 관리가 와서 말하기를 “부사[신계종(申繼宗)]가 석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상납한 자가 있었는데, 부사가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 물건은 박효자가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석류를 다시 가져다 주었다. 하루는 집에서 상자 안에 있던 석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박경보는 계단 앞에서 석류를 주워 만지며 울면서 여러 날을 축원하였다. 이에 홀연히 석류가 익었는데 이때가 6월이라고 한다. 한편, 명종이 죽은 후 영해도호부사가 쌀과 고기를 보냈으나, 박경보는 군부일체라며 사양하며, 거친 음식으로 3년을 보냈다고 한다. 86세에 임종할 때 자식들에게 “삼가 효라는 글자 한 자라도 나에게 더 보태지 말라.”라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경보의 효성을 인정하여 조정에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며, 박경보의 행장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신이재(莘伊齋)[박경보 재실(齋室)]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