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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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再興 |
영어공식명칭 | Park Jaeheung |
이칭/별칭 | 박재흥(朴在興)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진희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1월 14일 - 박재홍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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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박재흥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2월 14일 - 박재홍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박재홍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재홍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393 |
활동지 |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재흥1896년 1월 14일 태어났으며, 본적지와 주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393이다. 이명은 박재흥(朴在興)이다.
[활동 사항]
영덕군 창수면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약 200명의 군중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해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셔졌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을 전부 파손되었다. 만세 군중들은 오후 7시가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이때 박재흥(朴再興)은 주재소에 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짖고, 몽둥이를 이용하여 창수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창수주재소 벽을 무너뜨릴 때 장구동의 오만이, 오촌동의 이기성, 길상동의 김중규, 신리동의 신갑수 등은 돌을 이용하였고, 창수동의 김반석·박계도, 장구동의 박숙이, 신리동의 이석범·박종하, 박재흥과 같은 마을인 창수동의 윤학근 등은 몽둥이를 활용하였다. 이외에도 창수동의 유말동, 신리동의 정석출 등은 발로, 신리동의 황부칠·우주일·김도치 등은 손으로, 창수동의 백수학·이선봉, 신리동의 정재주·오해봉·김연순·김덕규·정학수 등과 함께 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박재흥(朴再興)도 체포되었다. 박재흥(朴再興)은 4월 29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건조물손괴, 기물훼기, 공문서 훼기,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을 확정받았다. 1920년 4월 28일 풀려날 때까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