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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0460
한자 李大源
영어음역 Yi Daewon
이칭/별칭 호연(浩然)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
성별
생년 1566년연표보기
몰년 1587년연표보기
본관 함평(咸平)
대표관직 녹도만호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호연(浩然). 진사 이인고(李仁考)의 손자이며, 이춘방(李春芳)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이대원은 1566년(명종 21)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83년(선조 16)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으로 있다가 동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수사(水使) 심암(沈巖)에게 넘겼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심암의 부탁을 거절하는 바람에 미움을 샀다.

이어 여수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왜구에게 사로잡혔으며, 이대원은 절명시를 써 가슴에 품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되었다. 손죽도 사람들은 이대원을 잃게 되자 섬의 이름을 큰 인물을 잃었다는 뜻으로 손대도(損大島)라 일렀다 한다. 이에 앞서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은 사실과 심암의 못된 짓이 관찰사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으며, 이로 인해 심암은 파면되고 이대원은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의 명이 도달하기 전에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이대원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해안 지방의 아녀자들은 물론 기생들까지도 펑펑 울면서 누가 지은 줄도 모르는 다음과 같은 「애도가(哀悼歌)」를 불렀다고 한다. “아, 슬프다/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 오직 나라 위한 충신이셨네/ 배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장수들 물러가고 포로가 되었어도/ 백만 적진 가운데서 주먹을 휘둘렀다네(咄憐哉 鹿島萬戶李大源 端只與國爲忠臣 船入海洋兮 虜進主將退 百萬陣中空張拳).”

[저술 및 작품]

이대원이 죽을 때 남긴 절명시가 다음과 같이 전하여지고 있다.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임금과 부모님 은혜 갚을 길 없어 / 원한이 구름 속에 얽혀 풀리지 않네(日暮轅門渡海來 兵孤勢乏此生哀 君親恩意俱無報 恨入愁雲結不開).”

[묘소]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산83-6의 대덕산 밑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대원은 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이대원 장군을 모신 여수 손죽도이대원사당인 충렬사에서는 해마다 3월 삼짇날에 숭모제(崇慕祭)를 모시고 있고, 여수 영당과 고흥 쌍충사(雙忠祠)에도 제향되었다. 고향인 경기도 평택 포승면 내기리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워 이대원을 추모하고 있으며, 167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도비가 사당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남구만이 찬하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01 행정구역 승격으로 인한 현행화 평택시 포승면->평택시 포승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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