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이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71
한자 滿洲 移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만주 이민 발생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명수|류기종|김정제|윤길|이규동|황석현

[정의]

1910년부터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일.

[개설]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1,034개소 가운데 중국이 484개소로 절반 가까운 47%에 달한다. 충청남도 출신 독립운동가의 85%가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사실은 보령 지역 독립운동가의 특징을 이룬다.

[역사적 배경]

한인(韓人)의 만주 이주 시기는 「봉금령(封禁令)」[중국 청나라 때 한인의 만주 이주를 금지한 법령]이 해제되며 증가하였는데, 이주 동기는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파악된다. 정치적 이유는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고, 경제적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또한 ‘만주’라는 지역이 고대 이래로 우리 역사의 무대였다는 역사·문화적인 이유도 작용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만주 지역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한인 사회를 배경으로 독립운동 기지 개척과 독립 군단 편성이 본격화되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의 한인 사회는 3·1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자주독립의 열기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크고 작은 국내 진공 작전을 추동(推動)[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고무하고 격려함]하였고, 결국 봉오동전투 승전과 청산리대첩을 이루었다.

[경과]

경신참변(庚申慘變)과 헤이허사변[黑河事變]은 독립군과 한인 사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독립군 진영은 정비와 통합 운동에 나서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의 3부로 존재하다가 민족 유일당과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국민부가 결성되었다. 계속하여 만주에서는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이 독자 또는 중국 항일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부터 유입된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다수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동북 항일 연군과 같은 단체도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만주와 관내 등 중국 지역에서 활동한 충청남도 출신 인물들은 다양한 계열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결과]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만주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는 6명 정도 확인된다.

먼저 김명수(金明秀)[1892~1972]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1889~1930]과 연계하여 충청남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때, 노재철(盧載喆)[1889~1961] 등과 함께 모금 계획에 찬동하여 적극 협력하였다. 1921년 음력 3월 상순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자택에서 임시정부군정서 및 재무서 명의의 도장을 제작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한 문서 제작에 사용하게 하였고, 같은 달 하순에는 보령군 대천면 화산리의 황오현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류기종(柳冀宗)[1882~1959] 또한 김좌진의 길림군정서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하여 파견한 김영진(金瑛鎭)의 지시에 따라 선전물 인쇄 및 배포 작업에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김정제(金廷濟)[1881~1963]는 1923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 군자금 모집 사건에 참여하였으며, 윤길(尹洁)[1882~1943]은 1914년 만주 통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에서 여준, 이승규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격문과 신한민보를 휴대하고 국내에 들어와 동지들과 활동하다가 체포된 독립운동가이다.

한편, 이규동(李圭東)[1889~1950]은 1917년 중국 동삼성(東三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신흥학교를 수료한 후 1919년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대사탄(大沙懶)에서 독립선언축하식을 거행하며 시위하고 1928년 정의부 대표로서 신민부 참의부와의 삼부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이규동은 남자현(南慈賢)[1872~1933]과 함께 일본 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기 위한 폭탄 운반에 협조하였으며, 1938년 11월에는 이종대(李鍾垈)가 설립한 영신농장으로 이전하여 영신농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 사업에 이바지하면서 조선독립촉진회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끝으로 황석현(黃奭顯)[1886~1945]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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