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1298
한자 -保寧-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효경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도서 및 해안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고기잡이 방식과 생활.

[개설]

보령시의 어업은 연안 어업, 근해 어업, 구획 어업 등 다양한 어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획되는 어종은 1960년대에는 노래미, 갈치, 조기, 서대[박대], 강달어, 반지, 숭어, 가자미, 홍어, 병어, 전갱이 순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멸치, 키조개, 대구, 뱅어, 꽃새우, 아귀, 가자미, 오징어, 꼴뚜기, 소라, 주꾸미 순으로 어획되고 있다. 주 어종은 1960년대에는 갈치, 조기, 서대였으나 2000년대에는 멸치, 키조개, 대구로 변하였다.

[선사인들이 어로 활동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보령시]

보령시는 해안과 도서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매우 이른 시기부터 어로 활동이 확인된다. 2022년 현재 어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13개의 섬인데, 대천항에서 가장 먼 120리[약 47㎞] 떨어진 외연도를 비롯하여 호도, 장고도, 삽시도, 효자도, 원산도 등지에 선사인[선사 시대에 살던 사람]이 남긴 패총(貝塚)[조개더미]이 남아 있다.

여객선으로 2시간여 거리에 있는 외연도에는 선사 시대 어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라금 패총에는 홍합과의 섭조개와 굴 껍데기, 전복, 큰 물고기 종류도 있다. 갯바위에 서식하는 홍합, 굴, 전복 등은 오늘날까지도 주민들의 식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데, 선사인들에게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선사인이 농경을 비롯해 갯바위 어로, 그물이나 작살 등을 활용한 어로 활동을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보령시에 있는 약 300기의 고인돌이 바다와 접한 읍면에 분포한다는 사실은 보령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농경과 더불어 해양 생활을 병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외연열도를 비롯한 도서지역에서 확인되는 패총과도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어구(漁具)로 고기를 잡던 보령 사람들]

보령시에서 어로 활동이 발달한 곳은 13개 유인도[사람이 살고 있는 섬]와 대천항, 오천항 등의 주요 포구 주변이다. 내륙의 포구보다는 도서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어로 활동을 해왔다. 섬은 제각기 다른 자연환경으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어로 도구가 달랐고, 그에 따라 어획 어물도 달랐다.

유인도의 대표적인 어구는 주벅망으로 갯벌이 발달한 도서지역에서 주로 설치하였다. 주벅망은 조류의 흐름이 빠른 곳에 그물을 설치하여 고기를 잡는 전통 어법(漁法)으로, 두 개의 말장[기둥]을 세우고 그물을 쳐서 밀물과 썰물에 따라 이동하는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주벅망은 조선 시대부터 충청도의 대표 어구로 자리매김해왔다.

호도장고도는 갯벌보다는 갯바위가 발달해 해삼, 전복 등의 어물이 많아 ‘해녀배’를 주력 어구로 사용 중이다. 녹도외연도 등지는 조선 시대에 연안 항로를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 조운선(漕運船)[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뱃길로 운반했던 세곡 운반선]이 지나는 뱃길이자 수심이 깊어 조기잡이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남지나해, 동지나해에서 월동을 끝낸 물고기들이 북상하는 난류를 타고 서해로 들어오면서 어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고기를 깔고 앉아 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던 외연도 사람들]

외연열도 어장은 남쪽 바다에 비해 조류의 흐름이 빠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해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물발이 강해지고, 외연열도를 지나 어청도로 내려가면 점점 약해진다. 이동하는 고기들이 운동량이 많고, 적응력이 높아져 담백한 맛을 낸다.

보령시에서 육지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외연도와 주변 열도 지역은 1970년대 초까지 풍선(風船)[돛을 이용하여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는 배]을 타고 고기를 잡았다. 외연도녹도와 달리 섬 주변의 수심이 깊고 조류의 흐름이 빨라 주벅이나 어살 등의 어구를 설치하지 못하였다. 어살은 대나무 발 등을 치거나 돌을 쌓아서 밀물 때 연안으로 몰려들었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고기를 잡는 어구 또는 어법을 일컫는다. 따라서 풍선을 타고 인근 연해에서 홍어, 조기, 농어 등을 어획하였을 뿐이다.

고기를 깔고 앉았지만 그것을 잡을 능력이 없었던 이들이 외연도 주민들이다. 섬에 배를 접안할 시설도 부족해 일제 강점기에는 외연열도에서 어획한 수백만 원에 달하는 어물을 모두 접안 시설이 구비된 어청도에 하역하였다. 주민들은 어선 어업보다는 갯바위에 자생하는 돌김, 돌미역,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며 삶을 영위하였다. 이 가운데 돌김돌미역이 외연열도 주민의 주요 생산물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외연열도가 새로운 어업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어물을 어획하는 어선을 운영하기보다 꽃게, 삼치, 대하, 학꽁치 등이 계절에 따라 몰려드는 황금어장에 모여든 수백 척의 어선에 물품을 공급하는 중간 기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모여드는 어선과 어부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섬 내에는 여인숙과 술집, 양조장, 다방 등의 시설이 들어섰다. 동력선과 선진 어업 기술이 보급되면서 황금어장을 끼고 있는 외연도는 ‘외딴 섬’에서 풍부한 해산물로 인해 ‘부자 섬’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외연도 주변에서 어획한 어물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국민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먹거리 문화도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염장한 어물보다 활어를 즐기는 문화가 퍼지면서 외연열도에서 어획한 농어, 우럭, 도다리, 노래미 등이 소비자의 입맛을 만족시켰다. 외연도에서 어획한 어물은 도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고급 어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판로가 열리면서 새로운 소득원이 되었다. 활어 판매 이후 외연도 주민들의 소득은 크게 향상되었고, 농업을 중단하고 어업 위주의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살을 쌓았으나 지금은 해녀배 사업을 하는 장고도 주민들]

장고도는 섬의 앞쪽으로 갯벌이 발달해 있다. 장고도 주민들은 이곳에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어구인 독살을 쌓았다. 장고도의 넓은 갯벌에는 돌이 많고, 사방이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 돌을 이용하기가 쉬웠다. 1980년대 이전까지 섬 주변에 소실녀 독살, 집앞이 독살, 부녀 독살, 명장섬 독살 등이 있었다.

독살은 개인이 쌓고 관리하는 함정 어구였다. 독살은 안쪽은 반듯하게 돌을 쌓지만 바닷물이 닿는 바깥면은 비스듬히 쌓아 물살을 견딜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낭장망(囊長網)이 보급되면서 독살의 원리를 그대로 원용해 낭장망을 운영하고 있다. 낭장망은 바다 밑에 긴 자루그물의 입구와 끝을 고정한 뒤, 사리 조류에 의해 그물 안으로 들어온 물고기를 어획하는 어구이다.

방파제나 선착장을 만들면서 독살의 돌을 헐어서 사용하였기에 지금은 독살이 남아 있지 않다. 돌로 쌓은 돌 그물인 독살에는 조기와 숭어가 많이 들었다. 또한 섬 주변의 깊은 물속에 암초가 발달해 있어 해삼과 전복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따라서 제주 해녀들이 일찍이 와서 선주와 해녀들이 수익을 일정액으로 나누는 해녀배 사업이 발달하였다.

[수심이 빠른 섬 주변에서 주벅망과 주낙배를 타다가 안강망(鮟鱇網)으로]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녹도는 충청도 연안의 제1류 어장이었다. 어획량이 많아 전라도 칠산 어장, 충청도 죽도 근해 어장과 함께 손꼽히는 어장이었다. 조수 간만으로 인해 넓게 드러난 조간대에는 말뚝을 박고 짚으로 주머니형으로 그물을 짜서 고기를 잡았다.

1910년에 출간된 『한국수산지』에는 녹도에 150여 개의 주벅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어장 보호를 위해 그물 규격과 그물 구역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이를 어기면 어구와 어선을 몰수하였다. 주벅 어장은 임대를 주거나 매매를 통해 양도할 수 있었다. 녹도 주민보다 포구 어업을 통해 큰 부를 이끈 홍성군 성호포구 주민과 보령군 원산도 주민이 주벅을 맸다. 1960년대 회유하던 조기가 사라지면서 녹도 어장의 장시(場市)는 중단되었다.

“자귀나무 꽃이 피고, 매미가 울면 조기가 한창이다.”라는 말이 있다. 즉, 조기잡이는 여름철이 절정이다. 조선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가장 중요한 어종이 조기였고, 대규모 선단이 이동함에 따라 조기잡이에 관한 어로 문화가 형성되었다. 삽시도고대도 사이에는 배가 다니는 항로를 제외하고 섬과 섬 사이의 공간에는 주벅망이 가득 찼었다. 이들 주벅망은 대부분 고대도 주민이 맸다. 1973년 즈음에 이미 큰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주벅망은 쇠퇴 일로에 들어섰다.

녹도 주민들은 어청도, 외연도, 울섬 근처에서 주낙을 놓았다. 주낙은 한 가닥의 긴 모릿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어업 자원 생물을 잡는 어구를 말한다. 장고도, 고대도, 삽시도에서도 상황은 유사하였다.

1980년대에 낭장망이 보급되면서 주벅망은 소멸되었고, 1983년 이후로 낭장망이 확산되었다. 낭장망은 지선 2~3마일 떨어진 곳에 설치하였다. 안강망이 보급되면서 주낙, 주벅망 등의 어구는 점차 사라졌다. 안강망은 긴 자루 모양의 그물을 고정하여 놓고 조류에 밀려 그물 안으로 들어온 대상물을 잡는 어구 또는 어업 방식을 일컫는다.

어선이 대형화되고 연근해 어종이 사라지면서 주벅망주낙 등으로는 조업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기다리는 어업이 아니라 찾아가는 어업인 연안 안강망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연안 안강망은 24시간 물 흐름을 따라 빙빙 돌면서 사방의 고기를 잡고, 조류가 바뀌면 그물 입구도 방향을 바꾼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어종을 어획하는 어구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어획 어종은 실치, 꽃게, 잡어, 까나리, 각종 잡어, 새우, 멸치 등이다.

그러나 그물의 크기가 작아 치어까지 어획하는 문제점이 있어 그물코 2.5㎝ 이상의 개량 안강망을 사용하도록 변경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개량 안강망은 작은 항구에 접안할 수 없기에 섬 주민들은 배를 가지고 대천항으로 이동하였다. 섬에는 작은 어선만이 조업하고 있다.

[머구리가 키조개를 캐는 오천항]

오천항은 인근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곳으로 과거에는 중선(中船)을 부렸으며, 지금은 대형 어선이 입항하는 포구이다. 효자도 부속 섬으로 가는 여객선도 출항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천항을 비롯해 인근의 오천면 교성3리 도미항과 영보리에도 중선이 1척씩 있었고, 청소면 진죽리에도 중선이 2척 있었다.

1910년 이후 도입된 중선은 1970년대까지 조기잡이와 젓새우잡이를 하였다. 천수만 인근에서 젓새우를 어획해 광천장이나 강경장[갱갱이장]으로 팔러 다녔다. 어획량이 줄면서 1970년대 중반에 중선을 없애고, 소형 어선인 ‘낚배[낚싯배]’로 대하를 잡고 있다. 낚배를 타고 외줄 낚시로 대하, 농어, 조기 등을 어획한다. 어촌에 거주민이 줄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어선을 낚싯배로 전환해 운영 중인데, 현재 200척의 낚싯배를 운영 중이다.

오천항에는 일찍이 해삼과 전복 등을 채취하는 머구리[잠수부]가 들어왔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였는데,1970년대 이후 전문 다이버가 등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홍합을 채취하였으나, 일본으로 ‘키조개 관자’를 수출하면서부터 키조개를 채취하고 있다. 약 20명이 활동 중이며, 대천항에도 몇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키조개 채취에 사용하는 잠수기 39척에는 노란색을 칠해 다른 배와 구분한다. 노란색은 잠수기는 이동하지 않으므로 피해 가라는 표식이다.

[조류가 변하고, 어업 환경도 바뀌었다]

보령시 해안마을의 어로 활동은 일찍이 중단되었고,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어업이 전승되고 있다. 어물 섭취의 방식이 염장에서 활어로 바뀌면서 어로 활동이 강조되었는데, 도서지역 주민들은 생업 활동으로 행하던 농업을 중단하고 어업에만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어물 소비량의 증가는 도서지역 어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낙후되고 고립된 서해의 섬이라는 인식에서 탈피해 어업의 전진기지라는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1990년대 어촌계가 중심이 되어 자율 관리어업이 확고하게 기틀을 다졌다. 개인이 허가권을 지녔던 양식장이 어촌계 공동소유로 환수되면서 지속 가능한 자율 관리어업의 토대를 갖추었다. 어촌계는 양식업, 해녀배 사업 등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해안 조류의 흐름이 바뀌었다. 과거에 비해 조류의 흐름이 둔해졌고, 해안에 건조한 방조제와 간척지, 공단 건설 등으로 해양 생태계는 급속히 변화되었다. 특히 대규모 간척 사업 이후로는 조류가 바뀌거나 늦어졌다.

조류의 변화로 바다가 오염되고,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올라오는 어류들이 보령시 주변 도서를 경유하지 않고 북쪽으로 가고 있다. 회유하는 길목에 어민들이 친 수많은 그물과 첨단 장비로 무장한 낚싯배들로 인해 치어조차 말라가는 상태에 들어섰다. 이로 인해 도서지역 주변의 어장은 황폐화되었고, 이전과 같이 풍부하고 다양한 어물은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어종인 우럭, 주꾸미, 놀래미, 광어, 도다리, 멸치, 삼치, 도미, 해삼, 전복, 홍합 등이 차지하였다. 해안 주변에는 수많은 광어, 우럭 등의 양식장이 황금어장을 대신하고 있다.

[섬사람들은 어장기에는 섬에서, 휴어기에는 육지에서 생활하며 고기를 잡는다]

바깥 바다인 외연도·녹도 등에 거주하는 도서민은 섬 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 어장기에는 섬에 머물고, 고기를 잡지 않는 휴어기에는 육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생활 공간을 이중화한 탓에 겨울철에는 도서지역이 고령의 노인이 지키는 고독한 섬이 되었다.

주민이 섬을 떠나는 시기는 어기를 끝내고 마을 총회까지를 마친 이후로, 외연도 주민들은 12월 중순이 지나면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간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빈 섬에는 노인과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부 상점만이 운영 중이다.

[섬을 떠난 후손들이 돌아와 어업을 계승하다]

도서지역 주민의 걱정은 자녀들의 학업 문제이다. 중학교 이상은 보령시나 대전광역시 등지로 나가 학업을 이어 나가야 한다. 학업을 위해 섬을 떠난 자녀들은 섬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일부 후손들이 도시에서 다시 섬으로 돌아오고 있는 추세이다.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 어업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어부들의 고된 삶을 잇기 위해 되돌아오는 새로운 어업 계승자들은 현대식 어선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업의 전진기지에서 찾아가고 싶은 섬이 된 미래의 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07년에 진행한 ‘가고 싶은 섬’ 사업 대상지로 외연도가 청산도, 홍도, 매물도와 함께 선정되면서 섬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우선 사람들이 섬을 찾고, 살고 싶은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국책 사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가 2021년에 선정한 ‘찾아가고 싶은 섬’ 33개 중에 ‘걷고 싶은 섬 삽시도’, ‘이야기가 있는 섬 고대도’가 알려지면서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오지의 섬들이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생태자원을 갖춘 곳으로 어업의 전진기지에서 새로운 자원 창출이 가능한 미래의 섬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보령시의 도서들은 다수의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가보고 싶은 섬 1위’가 되어 문화 관광지로 급부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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