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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229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1919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기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영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주군 일원
관련인물/단체 홍종호|김흥배|유흥식|오언영|장천석|유석보|장량헌|이회갑|은경옥|손승억|윤주학|윤무영|이강호|김은배|이강렴|용명서당|충주간이농업학교|충주공립보통학교

[정의]

1919년 3월 11일부터 약 1개월 동안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뒤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교육과 종교도 탄압받았다. 한편 회사령으로 민족 자본가의 성장이 막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도시의 노동자 또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거세어져 갔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식민지 국가에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이 주장은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 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대열을 이루었으며, 시위의 맹렬한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당시 충주 일원에서도 거족적인 민족 독립 운동 소식을 접하고 종교계와 학교의 지도적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을 계획하였다.

[경과]

충주원에서 3·1운동이 최초로 발생한 시점은 3월 11일이었다. 3월 11일 당시 달천리(達川里)[현 달천동]에서 천도교인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헌병에게 저지당하고 해산하였는데 이때 홍종호(洪鍾浩)와 김흥배(金興培)가 체포되었다. 3월 12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읍내에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앞선 3월 10일 범바위에서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 기념 야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교사 유흥식(柳興植)과 학생 오언영(吳彦泳)·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이 충주 장날(3월 15일)에 맞추어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다. 아울러 충주간이농업학교 학생과 충주공립보통학교 학생이 의논하여 기독교 측과 제휴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부서를 결정하였는데, 이 계획이 헌병 보조원에 채용되기로 일제와 결탁한 정모에게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에 앞서 서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장량헌(張良憲)은 서울에서 경고문을 지참하고 충주로 내려와 교인 유석보 소년의 도움을 받아 이것을 비밀리에 교회 안에서 수백 매 복사하였고, 또 범바위 야유회에서는 유석보가 교회 측과 연락을 맡게 되었다. 이 경고문은 최명희 등에 의해서 각처에 배포되었다. 그 후 기독교 측은 충주 탄금대로 독립 만세 시위 준비 장소를 바꾸어 비밀리에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였고,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귀국한 김부원(金富元)도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이들은 거사 전에 체포되었다.

4월 1일 신니면 용원 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2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동 인물은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날에 이희갑(李喜甲) 외 일곱 명이 연서한 선전문 여러 장이 부근의 식자들에게 배포되고, 용명서당(龍明書當)의 학생 은경옥(慇慶玉)은 서당 학생들을 동원하려다가 일본인 선생에게 제지당하였다고 한다. 이날의 만세 시위는 두 곳에서 전개되었다.

[결과]

충주면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김부원·장량헌·최명희·오언영·장천석·유석보가 체포되어 청주까지 도보로 압송되었는데,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의기양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김종부의 주창 하에 장·오·최 등 3인은 4월 8일경 충주면 칠금리(漆琴里) 권태은(權泰殷)의 집에서 결의하되 충주공립보통학교 여자 교원 김연순(金漣順)에게 한국 독립운동 계획의 권유문을 보내어 그녀로 하여금 같은 학교 여학생을 참가시켜 충주 장날 장꾼이 모이는 때에 거사하고자 하였다.

김종부는 주머니칼로 왼쪽 장딴지를 찔러 그 피로써 태극기를 그리고, 장량헌을 시켜 그의 구술 하에 태극기 여백에 한국 독립을 고취한 문장을 쓰게 하고, 그 외에 경고문과 독립가(獨立歌) 각 한 통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어, 이를 피로 그린 태극기와 함께 오언영으로 하여금 김연순에게 주도록 하였다

오언영은 즉시 피로 그린 태극기에 적힌 취지에 찬성을 구하는 서면 한 통을 작성하고 자기 누이로 하여금 김연순에게 전하려 했으나 그녀가 쉽게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김종부가 직접 그녀와 만나 자기의 팔을 찌르려고 하여 그녀의 찬성을 얻었다. 최명희는 금가면 도촌리의 엄용복(嚴龍福)에게, 최명희와 장량헌은 엄정면 목계리 김종태(金鍾台)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신니면 용원 장날 만세 운동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이에 대한 재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경옥(慇慶玉)·이희갑(李喜甲)·손승억(孫承億)·윤주학(尹周學)·윤무영(尹務榮)·이강호(李康鎬)·김은배(金殷培)·이강렴(李康濂) 이상 피고 8명은 한국 독립운동의 목적으로 3월 31일 이희갑 집에서 4월 1일에 신니면 용원 장터의 장날에 군중을 선동하기 위한 선언서 및 태극기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은경옥·이희갑·이강렴·손승억은 스스로 독립운동 대표자로서 한국 독립운동 계획을 고취한 문사(文辭)가 담긴 선언서 일곱 통을 복사하였고, 윤주영·윤무영·이강호·김은배는 은경옥·이희갑·이강렴과 같이 구한국 국기, 즉 태극기 19폭을 만들고, 또 다음 날인 4월 1일에 용원 장터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9년 충주 지역의 3·1운동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충주 지역민들의 희생과 노력이었다.

[참고문헌]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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