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 은 비석동산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큰말과 신골(싱골)로 이루어졌다. 성동마을로 가는 길은 풍덕마을과 같다. 즉 주덕에서 노은으로 연결되는 52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1.9㎞ 지점이 주막거리이고 이곳에 성동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 버스정류장 옆에는 성동마을 안내비와 이덕량의 개척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마을에 이르는 길이 나있고, 왼쪽으로...
제내리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풍덕마을의 동쪽 언덕인 제내리 353번지에 입향조 이덕량의 장남인 이정지(李廷芝)의 묘와 묘역 입구에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고 여러 기의 묘가 있다. 이정지의 묘는 가장 상부에 있으며 10여 평의 규모에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묘역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마을쪽 언덕 위에 있으며 비각을 세우고 있어 이채롭다. 비석의 총 높이는...
풍덕마을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한다. 그러던 중 15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인대군의 후손인 이덕량(李德樑)이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덕량[1576~1651]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 이름은 덕명이었다....
입향조 이덕량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이름은 덕명(德明)이라 했으며, 어려서는 현덕(玄德)이라 불렀다가 다시 덕량으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의 9세손이다. 만년에 벼슬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풍덕의 동북쪽 사락리 산 60의 엄동 황금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아버지는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의 입향조인 이덕량(李德樑)이다. 이정지는 어려서부터 밖에 나가 놀다 돌아와도 부모님께 절을 올렸으며, 어머니의 병환에 밤낮으로 의대를 풀지 않고 간병하였다. 돌아가시자 상례를 어긋남이 없이 하였다. 아버지가 병환 중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가뭄에 잉...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 입향조인 이덕량(李德樑)이며 아버지는 이정지(李廷芝)이다. 이진열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첨절제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진열의 공으로 할아버지인 이덕량은 호조참의에, 아버지 이정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형제들도 통덕랑의 벼슬을 받았다. 1723년(경종...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집성촌. 제내리(堤內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한 법정리이다. 이전에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죽안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제내리다. 제내리는 풍덕·성동·대촌 3개의 행정동(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주이씨 제내리 집성촌은 1590년대 중반 조선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의 9세손 이...
제내리는 주덕읍 11개 법정리 중의 하나이며, 성동과 풍덕의 2개의 행정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동이 28통이고 풍덕이 29통이다. 2008년 3월 현재 98가구 258명이 살고 있으며 남자가 139명, 여자가 119명이다. 주덕읍 전체인구가 6,480여명이니 제내리 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5% 정도이다. 제내리의 주민 258명 중 성동에 109명(남자 56명,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