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에 세워졌던 담배 수납장이 특이하게 생겨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윤우식 씨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6·25전쟁 때 불타버렸고 미군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1950년대(혹은 1960년대) 말에 재건축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인터뷰 과정에서 영단 방앗간의 창고 건물의 상량문이 남아 있어서 그...
1960년대 팔당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울에서 올라오던 황포돛대를 세운 상선들과 영월, 단양 등지에서 서울로 향하던 뗏목들이 목계나루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목계의 상경기는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목계나루에는 남한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손님들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와 찻배가 있어서 목계의 중요한 수입원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목계마을이 회복 불능의 상태...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조선국세조사보고’의 직업별 인구 항목에 보면, 충주군 전체 수산업 인구 25명 중 엄정면에서 수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9명이었다. 물론 엄정면에서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목계 밖에 없었으므로 이 9명은 모두 목계 주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어업에 종사하는 마을 사람들이 계속 있었으며 최근까지 목계에서 어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1930년대에 철도와 도로망이 개설된 후 수운을 기반으로 성장해 가던 남한강 주변의 많은 포구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목계는 나름대로 새로운 변신을 하며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6·25전쟁 이후까지도 수운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 초 팔당댐 공사로 수로가 막히기 전까지는 돛단배가 오르내렸고 강원도 정선 등에서 생산된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는 뗏목은 수시로 내려...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 속하는 법정리. 산계동과 묵밭골의 명칭을 따서 목계라 하였다고 하나 문헌에는 그 이전부터 목계라고도 하였다. 본래 충주군 엄정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창말·웃말·묵밭골·건너말 등이 통합되어 묵계동으로 개칭되었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중원군에 속하게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중...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서 붕어를 재료로 한 향토요리. 엄정면은 과거 목계나루에 세곡선과 상선이 드나들고 보부상들로 붐비었을 때에는 상주(常住) 인구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도 많아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그러다가 경부선 철로가 개통되고, 목계다리가 놓이면서 물류유통의 중심이 수로에서 육로로 바뀌었고 목계는 급속히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남한강이 흘러가는...
목계2리 이장인 우수인(55세) 씨를 통해 의사자 유현상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07년 7월 1일, 이날 많은 사람들이 목계강 변에 나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강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거나 보트에 타고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낚시 배를 타고 강 깊숙이 들어가 낚시를 하는 강태공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 일대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나기 시작...
목계 주민들이 매년 정월 9일 당고사를 모시는 부흥당은 목계에서 원주로 가는 길가에서 봉제산(부흥산) 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30m쯤 올라가면 있다. 단칸 목조와가(木造瓦家)로,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 아마도 위쪽에 바위가 있어 넓은 터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올라가면서 오른쪽 바위틈에도 약간의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릴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목계 서북쪽 입구 노변공원과 목계줄다리기 별신제유래비가 서 있는 곳에는 목계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공덕비에 학교 설립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서로 엇갈린 주장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윤해영 씨의 아드님이신 윤우식 씨를 윤태호 씨와 함께 찾아보기로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서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강경한 어조로 “그런 일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