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풍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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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서는 일찍부터 경로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37년 11월 5일 방풍림계에서 경로잔치를 베푼 이후 간간히 이어오다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로 효친을 위한 마을 사람들의 노력은 남달랐다. 그리하여 1978년 3월에는 경로당을 세우자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준비하였다. 각 반장과 청년회원을 위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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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디에서나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제내리에서도 마을 공동으로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열성이 일찍부터 있었다. 서당 교육으로부터 강당계를 조직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사립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문맹자를 없애겠다는 젊은이들의 열기가 가난한 농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선각자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교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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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풍덕마을의 동쪽 언덕인 제내리 353번지에 입향조 이덕량의 장남인 이정지(李廷芝)의 묘와 묘역 입구에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고 여러 기의 묘가 있다. 이정지의 묘는 가장 상부에 있으며 10여 평의 규모에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묘역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마을쪽 언덕 위에 있으며 비각을 세우고 있어 이채롭다. 비석의 총 높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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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마을에서는 일찍부터 주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를 방풍림계에서 구입하여 활용하고 있다. 1953년 11월에는 양곡의 공판 시에 저울이 필요함으로 5개를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으며, 1958년에는 분무기(배부식)를 5개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다. 1961년 4월에는 미국 극동개발재단에서 동력 분무기를 기증받기도 하고, 1962년에는 양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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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회는 1932년(壬申) 1월 29일 이성호(李誠浩) 외 44명이 벼 한 말(50전)씩 거출하여 종자돈으로 삼아 자력갱생과 저축 증대를 추진하며, 마을에서 혼인이나 상례 시에 반드시 사용하는 차일·교자·상여·남녀의 혼례복 등을 마련하고, 일이 있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상호 협조하며 상호부조(相互扶助)하던 조직이었다. 1954년까지 가입한 회원의 총수는 8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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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 말기에 사립학교가 문을 닫은 후 제내리를 비롯한 인근마을 학생들은 멀리 요도천을 건너 통학하여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취학 아동 수도 크게 늘면서 1946년 초부터 초등학교의 설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대상지로는 이웃한 성동의 청룡안과, 장록개 흰모루, 풍덕의 마당재가 물망에 올랐다. 각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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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마을은 지리적·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기장 기초적인 농민의 생활공동체이다. 제내리에서도 농경을 중심으로 지리적·지형적 특성에 따라 경작지에 인접한 풍덕마을에 정착함으로써 농촌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은 농경에 기초한 노동교환, 상호부조, 문화교류 등과 같은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상호작용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을은 부락민들 사이의 일체감과 동질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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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 풍덕마을이 선구적인 농촌마을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를 이어 마을을 이끌어 온 선구자적인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풍덕마을에는 마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이장을 비롯하여 각종의 모임들이 조직되어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며 발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각종의 모임들은 운영해 가는 과정에서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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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숲이 된 방풍림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만남의 공간이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와 휴식처를 제공하며, 특히 1971년 새마을 회관이 건립되면서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공간이자 영농에 관한 정보교환의 장소요, 마을 주민들이 화합을 도모하며 공동 행사를 치룰 수 있는 집회소였다. 그야말로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풍림에는 고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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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에 있는 비. 풍덕마을 입구에는 본래부터 숲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하자 1906년 이석호(李錫浩) 등의 마을 사람들이 호당 겉보리 한 말씩을 추렴하여 숲을 조성하고 방풍림이라 명하였다. 1907년에는 수재, 화재, 풍재 등을 방지하고 위생을 철저히 하여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식으로 방풍림계를 결성하였고, 10개 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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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 치하에서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해 1921년 4월 제내리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성동 평전마을에 신성학원(信成學院)을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민호, 서천순 선생님이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선생님은 모두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일제에 의하여 구속되면서 학교는 3년 만에 자동 폐교되었다. 신성학원이 폐교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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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가 다른 마을보다도 훨씬 살기 좋은 시범마을이 된 뒤에는 마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가며 주민을 위해 일을 하고 앞서가는 생각을 갖고 있는 지도력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려고 추진한 소방기의 구입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제내리에서는 1928년 12월에 4인 완용 펌프식 소방기를 구입하였다. 풍덕에서는 구입대금의 반액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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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풍림이 숲을 이루며 마을의 풍요와 편안함이 함께함에 따라 풍덕마을 주민들은 숲의 보호와 육성을 위한 관리에도 열성적인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 왔다. 다음의 사례들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7월 수구막이 숲이 고사하자 다시 조림하고자 이석호 등이 겉보리 한 말씩을 걷어 기금을 조성하였다. 이 기금에 공말과 속담말의 협조를 받아 제내리 306번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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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풍덕마을 방풍림계를 창설한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는 비.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의 허함을 막기 위하여 1906년 호당(戶當) 보리 1말씩을 추렴하여 계를 만들어 방풍림을 창설한 참봉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풍덕마을 주민들이 1955년 3월 창설 50주년 비를 건립하였다. 주덕 오거리에서 노은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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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에서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마을 제사. 1906년 풍덕 유지들이 마을 들머리에 숲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먼저 마을 주민 30명이 숲계를 조직하고 숲 조성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보리 한 말씩 거두었다. 숲을 관리할 조직을 세우고 기금을 어느 정도 마련하자 마을 수구(水口) 자리의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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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개발 사업은 1958년 10월 이 사업을 추진할 ‘지역사회개발중앙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도 및 군 단위의 지역사회개발위원회가 결성되며 시작되었다. 관 주도로 시작된 지역사회 개발사업은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군의 관계과장, 교육감, 농사교도소장, 협동조합장 및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된 4명의 지도원으로 ‘지역개발군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밑에 시범부락의 부락민으로 구성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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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집성촌으로 번성을 이루어 왔다. 이덕량의 부친인 이식(李軾)을 시조로 방호파를 이룬 것이다. 이처럼 전주이씨가 대종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의 공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마을에 존재했던 대동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동계의 역할을 종회가 중심이 되어 풀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성동마을의 경우에는 타성의 유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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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까지만 해도 풍덕마을에는 라디오가 한 집도 없었다. 유성기가 2대, 신문 구독자가 겨우 세 집 뿐으로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면사무소나 조합의 회의에 참석하고 온 대표가 소식을 전하려면 동산에 올라가서 회의하러 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전달 방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행정적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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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풍덕과 성동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공회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풍덕마을의 이칠영(李七榮)이 제내리 303번지의 밭 200평을 부지로 희사함으로써 풍덕마을에 세우게 되었다. 풍덕에서는 방풍림계에서 건축비의 반액(62원 50전)을 지불하였다. 그 후 1934년에는 동네의 학생들이 멀리 용원과 대소원으로 통학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사립학교를 건립 운영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