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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내미부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80
한자 甘勿內彌部曲
영어의미역 Communities of Low Caste Laborers, Gammulnaemi
이칭/별칭 감내며,감물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고려시대
시행연도/일시 고려시대
폐지연도/일시 15세기경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개설]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충주목에 설치된 감물내미부곡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 군현제의 하부기구로 예속시키고 군현제를 통해 간접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충주목에 편제되었던 감물내미부곡 또한 이러한 부곡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12세기 이후 고려 사회의 변동과정에서 민(民)의 의식이 성장하여 신분해방을 천명하는 노비들의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곡민이 이에 합세하는 일들이 벌어지자, 무신정권은 부곡민을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외침에 저항한 군공 포상 등의 형태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기도 함으로써 사실상 고려의 신분질서와 체제는 해체의 길을 걸었고, 부곡제도 그러한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갔다.

[제정경위 및 목적]

감물내미부곡은 고려시대부터 충주목에 설치되었던 지방의 특별행정구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물내미부곡은 충주의 남쪽 45리 정도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전국의 다른 부곡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지방 관리를 편성하였다. 세종 대에는 연풍현에서 감물내미를 귀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충주에 소속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낸 일화도 전한다.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충주목(忠州牧) 기록에는 “부곡(部曲)이 셋이니, 소잉림(所仍林)·광반석(廣反石)·감내며(甘內旀)이다.”라고 하여 감물내미부곡이 충주에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감내며부곡의 성이 하나이니, 노(盧)이다.”라고 하여 부곡인의 성씨도 전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충주목 성씨(姓氏)조에는 노씨 외에도 김(金)씨·유(劉)씨·석(石)씨도 함께 전하고 있다.

한편, 『세종실록(世宗實錄)』의 1429년(세종 11) 1월 16일(계해) 기사에는 연풍현(延豐縣)에서 감물내미(甘勿內彌)를 부속(附屬)시키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충청도에서 “감물내미 등의 땅은 양읍(兩邑, 충주와 연풍)과의 거리가 비록 엇비슷하나, 연풍현과는 큰 산으로 서로 막혀 있으니 그대로 본주에 붙여 두는 것이 편하겠다.”고 한 보고에 따라 그대로 충주에 귀속시키는 결정을 한 내용도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주목 고적(古跡)조에도 충주의 여러 부곡 중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주(州) 남쪽 45리에 있다.”고 하여 『세종실록』과 마찬가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감물내(甘勿內)는 본래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조선 후기에는 부곡에서 일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감물내미부곡은 최초의 설치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이래 감내며부곡·감물내미부곡 등의 명칭으로 존속하다가,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일반 행정구역인 감물내로 변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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